[황우석 쇼크, 진실에서 희망을 찾다] <상> 젊은 과학자들의 고뇌
여론에 맞서 과학적 검증을 외로이 주장…’교수가 왕’ 분위기 새롭게 바꿔야
황우석 교수의 논문조작 진상이 오리무중으로 빠져들던 즈음 기자는 “펜을 놓아버리겠다”는 시건방진 생각을 했었다.
그 때 브릭(BRICㆍ생물학연구정보센터), 사이엔지(한국과학기술인연합) 등 인터넷 사이트에서 “이대로라면 피펫을 놓을지 모르겠다”는 글을 읽었다. 젊은 생명과학자들은 생업을 뒤로 한 채 ‘이상한’ 일들을 했다.
밤새 황 교수와 공저자들의 모든 논문을 일일이 뒤져, 데이터 조작과 서로 다른 논문에 겹치기 출연한 사진들을 지적하고, 제보하고, 토론했다. 누가 시킨다고 한 일이 아니다.
이 집단이 보여준 집념의 원천은 이러했을 것이다.
“좋다. PD수첩은 강압취재를 했다. 그런데 줄기세포 DNA지문이 왜 환자 체세포와 일치하지 않거나 검출이 안 됐단 말인가? PD수첩의 DNA검증이 그렇게 엉터리라면(전문가가 보기엔 꼭 엉터리라는 근거는 없다) 재검증해서 확실히 하면 될 것을 왜 황 교수가 거부하는 걸까?”
젊은 생명과학자들이 원한 것은 과학적 진실이었다. 그들은 황 교수가 DNA재검증으로 과학자의 권위를 되찾기를 바랬다.
“재검증하면 다시는 사이언스에 논문을 낼 수 없다”거나 “후속 연구로 검증하겠다”는 황 교수팀의 변명은 일반인에겐 그럴듯했지만 전공자들에게는 ‘비과학적 논리’였을 뿐이었다.
서울대 소장파 교수들이 9일 정운찬 총장에게 학교 차원의 검증을 촉구하는 건의문을 낸 후 기자를 만났을 때 그들은 근심어린 표정이었다.
“중진 교수 중 저희에게 전화해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수고했어’라고 말씀하신 분도 계셨어요. 최소한 생명과학 전공자들은 누구나 이 논문에 문제가 있다는 걸 압니다.
다만 여론이 이렇게 안 좋으니 걱정입니다.” 과학적인 검증을 하자는 전문가 집단의 건의에는 흡사 독립운동과 같은 용기가 필요했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우리 과학계의 문제는 사이언스도, 외국 과학계도 아닌 우리 손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젊은 과학자들에게서 기대와 희망을 본 동시에 기자는 좌절과 안타까움도 느꼈다.
김선종 피츠버그대 연구원은 PD수첩과의 인터뷰에서 “사진을 늘리라”는 황 교수의 지시에 “나는 그레이드가 아직 안 되었기 때문에 말조차 하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비단 김 연구원 개인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그 역시 브릭에 글을 올리는 수많은 젊은 생명과학자 중 하나에 다름 없다. 물론 그에겐 잘못된 지시를 거부하지 않은 책임이 있다.
하지만 그러려면 브릭에 글을 올리는 것보다는 훨씬 큰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자신에게 선택이 주어졌을 때 옳은 길을 택하는 것이 진정한 용기다.
문제는 우리 실험실의 실상이다. 한 대학 교수는 이렇게 털어놓았다. “실험실은 말 그대로 공장 또는 회사다. 출퇴근 시간이 정해져 있고, 교수에 대한 충성심도 대단하다.
교수의 부당한 요구에 자기 의견을 말하면 당장 눈에 보이는 불이익을 당한다기보다 학생들 사이에서 ‘왜 너만 튀려고 하냐’는 눈총을 받게 된다. 학생들은 일단 졸업에 최우선 순위를 두고, 시키는대로 하면서 순서대로 졸업할 뿐이다.”
석ㆍ박사 학생들은 값싼 노동력으로 취급받는다. 많이 성장했지만 아직도 전체 연구비 규모가 부족한 우리 정부의 대학 연구원 임금 규정은 석사급 40만원, 박사급 70만원이다.
그나마 연구원들에게 제대로 지급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한 교수는 “대개의 경우 랩장이 통장을 관리하며 회식도 하는 등 실험실 운영비로 쓰는 정도지만 드물게는 교수가 직접 10개의 통장을 들고 관리하며 맘대로 쓰는 경우도 봤다”고 털어놓았다.
능력 아닌 서열대로 학위를 받고 졸업하는 분위기에서 이름 넣어주기 관행이 나온다.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한 연구교수는 “괜찮은 저널에 논문을 하나 내고 학과 교수에게 불려가 심한 말을 들었다.
왜 자기하고 상의도 없이 맘대로 논문을 내느냐는 것이다. 다른 교수와 학생들 이름을 넣어주지 않은 것에 대한 질책이었다”고 말했다. 실적을 쌓아야 교수는 연구비를 지원받고 학생들은 졸업을 할 수 있다.
김선종 연구원이 잘못된 지시를 거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우리에겐 악습을 철폐할 제도가 필요하다.
서울대 소장파 교수들이 말했든 연구진실성위원회를 제도화하고, 브릭 회원들이 논의하듯 연구윤리 교육을 정규화하는 일이 그런 것이다.
황 교수 사태는 장기적으로 우리 과학계에 득이 될 것이다.
그래서 기자는 희망을 본다.
김희원 기자 h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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