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2주 전이었다. 한 할머니가 편집국으로 전화를 걸어 왔다. 기자를 찾은 할머니는 “신문 잘 보고 있다. 한국일보가 좋은 기사 많이 써줘서 고맙다”는 인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리고는 자신이 젊어서 공부도 많이 했노라고 전제한 뒤 당시 MBC 방송 ‘PD수첩’ 프로그램이 허위 주장을 제기, 달아오르기 시작한 황우석 교수 논란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그 이슈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축적하고 있었고 신문을 첫장부터 끝장까지 하나도 빼놓지 않고 읽는 것 같았다. 처음부터 이 문제를 줄곧 지켜보았다는 그 분의 말을 요약하면 “황 교수는 가짜고 사기꾼이다. 그의 연구 성과도 모두 거짓이다”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황 교수가 경력도 불투명하고 믿을 수 없는 인물이라면서 단호한 어조로 자신의 논점을 조목조목 짚어나갔다.
기자는 당시 그에 대한 지식이 일천했음은 물론 별 관심도 없었기에 그냥 “그러시냐”고 예의바르게 상대해 드릴 수밖에 없었다. 바쁜 아침시간에 통화가 길어질 것 같아 “정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면 오피니언 면에 글을 보내시라”고 제안하는 정도로 통화를 끝냈다.
그후 한 주가 흐른 지난 15일 새벽(미국시간), 기어이 그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황 교수의 주요 조력자였던 노성일 미즈메디 병원 이사장이 기자회견을 자청, “황 교수가 만들었다는 줄기세포가 하나도 없는 것 같다”고 폭로한 것이다. 2005년 사이언스 논문이 조작됐고, 체세포 복제 환자 맞춤형 배아줄기세포는 결국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이 소식은 즉각 주요 뉴스로 전 세계에 타전됐다.
그러나 황 교수는 같은 날 밤(미국시간) 국민들 앞에서 노 이사장의 주장을 차분한 태도로 반박했고, 노 이사장은 곧바로 재차 기자회견을 갖고 자신이 옳음을 감정적으로 호소했다.
의혹이 꼬리를 물고 진실공방이 벌어지자 한국은 온통 충격과 경악, 허탈에 빠졌다. 황 교수의 연구를 희망의 등불로 여겨온 불치병 환자들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경험을 했다. 서로가 얼마간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이번 사태에 사람들은 “도대체 뭐가 진실이냐”고 서로 물으며 정신적 공황에 시달려야 했다. 미주 한인들도 직장에서, 식탁에서 이 일을 으뜸 화제로 삼아 이민사회의 대화 수준이 한 차원 높아졌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미국에 살고 있는 기자도 그 날 온종일 가슴이 답답하고 얼굴이 화끈거렸으니 오죽하랴. 한국의 한 남성은 “헉~ 30년 동안 함께 살아온 아내가 남자였다니…”라는 비유로 쇼크를 표현하기도 했다. 혹자는 황 교수를 매장시키려는 음해세력이 있다고 말하기도 했고, 미국이 개입됐다는 음모론도 제기됐다. 희망 없는 시대에, 국가가 올인하고 전 국민이 열광하는 ‘국민 스포츠’가 되어버린 과학(여기엔 ‘과학에는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에게는 조국이 있다’는 황 교수의 말도 한몫 했다)이 맞은 당연한 결과라는 의미 있는 분석까지 나왔다.
이번 사태를 지켜보면서 가장 실망스러웠던 것은 학문의 길을 가고 있는 여러 당사자들의 여러 다른 말이 ‘학자 본연의 자세와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는 점이다. 이들의 말 바꾸기가 잇달아 목격됐다.
많은 언론들도 그랬다.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황 교수나 MBC를 편들거나 비판한 것은 물론 수시로 논조를 바꾸는 ‘감탄고토’식의 보도 행태를 보였다. 자기 반성은 어디에도 없었다. 상황에 놀아나는 줏대 없는 모습으로 국민들의 스트레스만 더했다.
황 교수가 줄기세포가 바꿔치기 됐다며 검찰 조사를 의뢰했기 때문에, 사태는 환자 맞춤형 배아줄기세포의 존재에 대한 서울대의 조사결과 발표 후에도 장기화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이번 일이 어떻게 귀결될지를 예단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것은 진실을 추구해야 한다는 점에서 학문의 길과 언론의 길이 별개가 아니라는 것이다. 20여년 전, 제목은 잊는 한 소설에서 읽은 구절이 기억난다. “네가 들고 있는 횃불이 ‘진실’이라면, 열 손가락이 다 타들어 가더라도 그것을 놓지 말라.”
김장섭 경제부 부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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