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혹자들은 “7년 전쟁기간 신기한 전술로서 백전백승한 명장이 하필이면 마지막 전투에서 그것도 격에 맞지 않게 몸소 북채를 들고 독전하다가 총 맞아 죽었는가?”라고 의혹을 제기하며 자살론을 거드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사실적 기록이 말해주듯이 노량해전은 이영남, 고득장, 방덕룡, 돌격장 이언량 등 조선의 수군장수 10명과 명나라 부장 등자룡이 전사한 가장 치열한 해전이며 이순신의 수군은 생각만큼 정예화된 수군이 아니어서 전투 수행을 일임할 정도가 못되어 이순신이 이미 초기 2차 해전인 사천해전에서는 병사들과 함께 활을 쏘다가 어깨에 총을 맞아 상처가 짓물러 고생한 전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또 노량해전에서는 이순신의 건강이 극도로 나빠진 위에 오래 눈병을 앓아 시력약화로 조총을 겨냥하는 왜군을 감지하지도 못했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더욱이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을 앞두고 이순신이 진린에게 토로한 편범불반(片帆不返), 우리 나라를 침입한 왜놈은 비록 한 조각 작은 배라도 살려 보내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보아 마지막 최대 전과를 위해 몸을 돌보지 않고 분전했을 가능성이 여실하다.
다음은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지 않고 아들 회와 조카 완, 몸종 금이와 몇몇 측근의 비밀계획에 의해 전사를 가장해, 살아서 잠적하여 은둔생활을 하다가 16년 뒤에 자연사했을 것이라는 서울대 물리학과 남천우 교수의 주장이다.
이 은둔설의 근거는 첫째, 가족 이외에 진린 등 시신을 직접 보고 확인한 기록이 없는 점, 둘째 이순신의 묘소는 처음 금성산에 비석 없이 16년간 조성돼 있다가 16년 뒤에 현재의 어라산으로 이장했는데 덕수 이씨 문종 족보에는 이장의 기록이 없는 점, 셋째, 유형은 1615년 2월에 죽었는데 죽기 전 평소 가족에게 “李公(순신)의 무덤에 碑를 세우지 않는다면, 내 무덤에는 碑를 세우지 말라”고 말했다는 유형 행장의 기록으로 보아 유형은 이순신 가족과의 교감으로 이순신의 은둔사실을 알거나 방조한 것으로 보며 16년 뒤 어라산에 이장할 때가 이순신의 자연사 한 때에 해당된다고 보기 때문이며, 넷째, 이순신 전사 당시 주위에 있었다는 사람과 대신 독전을 했다는 사람이 기록마다 여섯 가지로 크게 엇갈리는 이유가 허구적 전사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주장은 그 상황의 구성이나 연결로 무리가 없어 설득력이 있어 보이나 가장 핵심적인 요소인 이순신의 단순 강직한 성품과 그의 天命사상을 도외시한 결함이 있다. 즉 죽기를 각오하고 임금의 출전 명령을 거부한 그가 구차하게 잔재주를 부려 더 살기를 꾀했을 리 없고 그가 죽음의 위험에 빠질 때마다 주위의 권유를 뿌리치고 “내 목숨은 하늘에 달렸다. 죽게 되면 죽을 뿐이다”라고 일관된 사생관을 유지했겠는가?
남원출신 진사 의병장 조경남은 이순신 막하에서 예교성 봉쇄작전의 선봉장으로 참여하여 ‘난중잡록’이라는 객관적이며 신빙성이 높은 기록을 남겼는데 이순신의 전사 장면을 “…날이 이미 밝았다. 순신이 친히 북채를 잡고 먼저 올라가 추격하며 죽이는데, 적의 포병이 배꼬리에 엎드렸다가 이순신을 향해 일제히 쏘아 이순신은 총알에 맞고 인사불성이 되었다”라고 사실적 기록을 남기고 있다.
해군 충무공 수련원 연구실장으로 이순신 연구에 정진해온 최두환 박사는 그의 역작 ‘충무공 이순신 전집’에서 “충무공 이순신은 사생관이 뚜렷하므로 죽음에 대해서는 이미 초월하였다고 봄이 옳을 것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값으로 칠 수도 따질 수도 없는 충무공의 죽음 자체를 가지고 확실한 증거도 없이 상상 추측하여 새삼스레 자살이니, 위장사망이니, 은둔이니 하는 것은 백옥에 미하(아주 작은 티)를 찾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아무런 소득이 없을 뿐 아니라, 충무공의 거룩한 죽음에 오히려 모독이 될 뿐일 것이다”고 맺으며 근거 없는 논의를 차단하는 바람직하고 정리된 입장을 취하고 있으니 참고할 일이다.
공이 순국한지 4년 뒤에 나서 부윤을 지낸 맹주서는 충무공을 조상한 장편시에서 “본시 그 죽음 뜻이 있건만 /뒷 사람이 그 뜻을 어찌 알리요” 라고 한탄하며 지극히 숭고한 이의 마음씀을 범부의 잣대로 왈가왈부함을 일찍 경계하였다. 그렇다. 다만 문사들의 시문이 의혹을 구성할 뿐 조선의 정사가 ‘전사’로 기록하고 있음을 유의할 일이다.
이순신은 그의 시문에서 그리던 ‘전쟁 뒤의 평화로운 전원생활’을 이루지 못한 채 우리 백성을 침탈한 왜놈은 한 놈도 살려 보낼 수 없다는 단호한 결의로 대미를 완성하고자 몸을 돌보지 않고 용전분투 하시다가 적의 집중 사격으로 장렬히 전사하신 것이다.
이순신 전사의 날인 12월 16일을 맞을 때마다 충무공 이순신의, 남을 위하여 기꺼이 자기를 희생하는 지극히 숭고한 ‘이타(利他)의 정신’을 되새겨볼 일이다. <끝>
www.yisunshinusa.com
이내원/이순신 숭모인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