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2월 16일은 이순신 순국 407주기가 되는 뜻 깊은 날이다.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종영과 더불어 이순신 열풍의 한 해를 마감하면서 이 지극히 숭고한 분의 죽음에 대해 회자되는 다양한 이설을 정리해 보는 것도 바람직할 것이다.
이순신의 죽음에 대하여는 지금까지 세 가지 설이 엇갈리고 있다. 순수한 의미의 전사, 전사를 가장한 자살설, 전사하지 않고 16년 동안 은둔생활 하다가 자연사했다는 은둔설 등이 그것이다.
먼저 자살설의 근거를 들어보면
첫째, 유형(柳珩)의 행장이다. 유형은 이순신 막하의 해남 현감으로 이순신의 각별한 사랑을 받던 부장으로 이순신이 전사한 노량해전에서는 총상을 여섯 군데나 입고도 살아남아 제 5대 통제사를 지낸 이인데 “통제사 이공(李公)이 일찍이 마음속을 토로하면서 말하기를, 자고로 대장이 조금이라도 공을 이룰 마음을 갖는다면 대개는 몸을 보전하지 못하는 법이다. 나는 적이 물러가는 그 날에 죽는다면 아무런 유감도 없을 것이다.(吾死於賊退之日 則可無憾矣)”라고 쓴 기록.
둘째, 명나라 도독 진린의 이통제를 제사하는 글(祭李統制文)에서 “평시에 사람을 대하면 ‘나라를 욕되게 한 사람이라, 오직 한번 죽는 일만 남았노라(辱國之夫 只欠一死)’하시더니 이제 와서 강토를 이미 찾았고 큰 원수 마저 갚았거늘 무엇 때문에 평소의 맹세를 실천해야 하시던고, 어허 통제여!”라고 한 부분.
셋째, 숙종 때 대제학, 대사간, 판서 등을 지낸 서하 이민서(李敏敍)가 의병장 김덕령의 억울한 죽음에 대하여 쓴 ‘김충장공유사’에 포함되어 있는 “이순신도 싸움이 한창일 때 갑옷을 벗고 스스로 탄환에 맞아 죽었으니(李舜臣方戰免胄 自中丸以死)”라고 기술한 부분.
넷째, 이순신 자신의 정유일기 중 백의종군 노정에서 모친상을 당했을 때와 명량대첩 직후 막내아들 면이 아산 본가에 쳐들어온 왜군과 싸우다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등 겹친 불운에 극도의 비탄에 빠져 기록한 “다만 빨리 죽기를 기다릴 따름이다”(4월 16일), “일찍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4월 19일), “…아득한 저 하늘은 어찌하여 내 사정을 살펴주지 못하는고, 왜 빨리 죽지 않는가”(5월 6일),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마땅한데”(10월 14일)등 비탄의 기록과 그 밖에 KBS드라마처럼 선조 임금과 윤두수 등 서인 세력에 의한 이순신 탄압 분위기로 보아 전쟁을 이기고 공을 세워도 필경 살아남지 못할 줄을 미리 알고 전사의 형태를 빌어 죽을 때와 죽을 곳을 정해 실천했을 것이라는 문사들의 끈질긴 심정적 정황이론 등이다.
이순신을 발탁한 영의정 유성룡은 ‘李統制를 슬퍼함’이라는 추모시에서 “공로 높아 참소 모함 못 면했던가 /새 깃 같은 목숨이라 무얼 아끼랴” 라고 시대적 분위기를 아파했고 공보다 25살 아래인 금산군 매창 이성윤은 노량 충렬사에 헌액한 시문에서 “공로 커도 상 못 탈 것 미리 알고서 /제 몸 던져 충성 뵈자 결심했던가” 라고 안타까워했다.
이상의 네 논거를 보면 자살론자들이 이들을 지나치게 확대해석 원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첫째, 유형의 행장은 공을 세우는 세상의 일반적 세태를 언급하고 자기의 희망을 술회한 것이지 자살을 의도적으로 하겠다는 결의라고 볼 수 없고
둘째, 진린의 제문도 국치를 당한 무장이 그 치욕을 씻기 위해 죽을 때까지 싸우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전사’자체가 추구하는 궁극적 목적이라고 보기 어려운 것이다.
셋째, 이민서는 1633년에 태어나 이순신보다 88살 아래로 광주 목사로 있으면서 그곳 백성들로부터 감동적인 이순신 칭송을 듣고 스스로 그 전적지를 돌아본 뒤 설화를 채록하여 감동적인 명량대첩비를 쓴 숙종 때의 명신이지만 이순신 전몰 100여 년 후의 일로 난중일기에 명기된 적선의 수 330여 척을 500척으로 기술하는 등 자료의 실사와 고증의 부정확성을 노출하고 있다. 기록중의 ‘갑옷을 벗었다’는 면주는 진나라 장수 선진(先軫)의 고사 免胄先登(갑옷을 벗고 용감하게 앞으로 나선다)는 뜻으로 용기를 지칭하는 말이지 죽기 위해 갑옷을 벗는다는 뜻이 아니라는 해석이 있다. 또 육군과 같이 방탄 장비를 필수로 생각하지 않는 해군처럼 조선의 수군도 갑옷을 별로 필요 없는 거추장스러운 치장으로 여겼을 수도 있다는 견해가 있다.
넷째로 이순신의 정유일기는 목숨을 다해 충성했건만 통제사 파직, 구속, 고문, 사형의 위협, 백의종군신세, 모친사망, 막내아들 전사 등 극도의 불운이 겹친 데서 비롯된 극히 인간적인 절망과 비탄의 소리로 자살의 결의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계속>
이내원/이순신 숭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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