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나들이’에 나선 화가 헬렌 신(오른쪽)씨와 박혜숙씨가 LACMA에 앉아 세잔과 피사로의 예술세계에 대해 정담을 나누고 있다. <진천규 기자>
■헬렌 신-박혜숙 두 화가와 LACMA 나들이
19세기 프랑스는 미술의 지존이었다. 모든 미술은 파리로 통했다. 한 사조에 대한 또 다른 사조의 반발과 흡수, 혹은 반목과 타협이 꼬리를 물고 진행되면서 고전, 낭만,자연, 사실, 인상, 후기인상파가 한 세기를 풍미했다. 근대 미술의 본류가 형성된 것이다. 지금 LA카운티 뮤지엄(LACMA)에서는 바로 이같은 19세기 프랑스, 그 후반부의 주역중 한 사람이었던 세잔과 피사로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전시 작품들은 두 화가가 이젤을 나란히 세우고, 화구를 나눠 쓰기도 하던 1865~1885년의 작품들. 똑같은 풍경을 보고 그렸는데 전혀 다른 그림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이 기획전의 묘미다. ‘같이 또 따로’라는 유행어 그대로다. 눈썰미 있는 관람객은 나란히 걸린 65점의 그림에서 세잔과 피사로를 따로 골라낼 수 있다. 인상파 거장들의 작품은 그만큼 그들만의 주장이 뚜렷하다. 문화 나들이에 나선 헬렌 신·박혜숙 두 화가가 세잔 & 피사로 전을 찾았다. 헬렌 신씨는 서울대 서양화과를 거쳐 뉴욕대에서 미술학 박사 학위를 받은 이론파. 지금 예술대학 오티스(Otis)에서 서양 미술사를 가르치고 있다. 서울대 서양화과 재학 중 미국에 와 UCLA 미대를 졸업한 박혜숙씨는 LA의 풀타임 화가. 두 화가는 이 ‘명품전’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세잔 자화상(1873~1876년)
피사로 자화상(1873년)
남성적 세잔, 여성적 피사로, 같은 소재 달리 묘사
피사로, 짜임새 있고 원칙 충실
세잔, 필체 독특 힘차고 공격적
당시엔 모두 혁명적이라 여겨
박혜숙 LACMA의 세잔·피사로전은 추상이 풍미하는 현대 미술이 어디서 시작됐나 볼 수 있는 기회였어요. 자연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지 않고 자기 식으로 해석한 세잔에게서 추상미술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 같아요. 현대미술을 이해하려면 여기가 바로 기원이 아닌가 싶기도 하군요.
헬렌 신 올 여름 뉴욕의 현대미술관(MoMA)에서 세잔·피사로전을 보고 다시 보게 되는군요. 피사로와 세잔은 같은 모티프를 놓고도 다른 그림을 그렸어요. 각자의 욕망과 정신에 충실했다는 것을 이 전시회를 보면 확연히 느낄 수 있어요. 피사로의 그림은 원칙을 벗어나지 않은 반면 세잔은 원칙을 벗어난 그림이 많아요
박혜숙 그 ‘원칙’은 있는 그대로에 충실한 ‘사실주의적 원칙’을 말씀하시는 거죠?
헬렌 신 그렇죠. 구도와 구성에 있어서는 피사로의 그림이 더 짜임새 있고, 더 사실적이죠. 보기에도 편해요. 반면 세잔은 어딘지 모르게 닫혀 있고, 답답한 느낌이 들지 않아요?
박혜숙 저는 세잔이 답답하다기 보다 오히려 더 힘차고, 적극적이고, 공격적이어서 더 매력적이라고 생각해요. 바로 그 힘 때문에 자연스럽지는 않지만 인위적인 구성에 들어가기 시작했다는 느낌이에요. 그림을 보면 성격도 세잔이 더 강하고 강력했을 거라고 느껴져요.
헬렌 신 세대차 인가요?(웃음). 같은 인상파 중에서도 피사로가 열살 가까이 위였어요. 나이만큼 온화하고 포용력있게 인상파 그룹을 끌고 나갔다고도 볼 수 있죠.
박혜숙 아무튼 이 전시회 때문에 모처럼 두 대가의 그림을 실컷 봤네요. LA서는 세잔 그림도 보기 힘들어요. 겨우 노턴 사이몬 박물관에 몇 점 있는 정도죠.
헬렌 신 세잔은 필체가 독특하지 않아요?. 터치가 부채살 처럼 퍼져 나가고, 집 같은 걸 그릴 때는 거의 나이프를 사용했어요. 나무의 선도 착착 꺾어 내리는 나이프 터치를 많이 했구요.
박혜숙 재미있는 것은 당시 프랑스 사람들에게는 이같은 그림이 너무 혁명적이고 파격적이어서 편안하게 볼 수 있는 그림이 아니었다는 거죠. 지금 우리가 보면 너무 구식인데-.
헬렌 신 우리가 중학교 때 사생대회 하면 저렇게 그렸잖아요. 원근법을 따져 가면서-. 기법 이야기를 좀 더 하면 피사로는 점점이 터치해서 더 섬세하고 부드러움 느낌을 주죠. 점묘법으로 나아가는 모습이 보여요.
박혜숙 두 화가의 그림을 비교하면 세잔은 남성적, 피사로는 여성적이라고 할 수 있죠.
헬렌 신 피사로는 밀레의 그림과 모네의 그림도 많이 점화를 시켰지만 밀레처럼 로맨틱 한 건 없어요. 밀레는 풍경을 아름답고 따뜻하게 미화시켰지만 피사로의 농부는 일상생활에 적응해 살아가는 모습이죠. 또 다른 인상파인 모네와 비교하면 모네는 빛의 반사, 피사로는 빛의 즉물적 형상화에 주력했다고 할 수 있어요.
박혜숙 그림은 혼자 그리지만 실은 혼자 그리는게 아니에요. 너무 영향을 많이 받아요. 저도 그림을 그리다 보면 10년 전 LACMA에서 본 그림의 영향을 굉장히 많이 받는다는 걸 느껴요. 그게 머리 속에 남아 있었던 거죠.
헬렌 신 그래서 영국의 한 조각가는 ‘나는 나 스스로 된 것이 아니고, 뮤지엄에서 나를 만들었다’고 했어요. 박물관을 많이 다니다 보면 나도 모르는 새 박물관에 있는 모든 것들이 마음에 남아 있다가 자기도 모르는 새 형상화되어 나온다는 거예요.
박혜숙 작가는 개성적이어야 하고, 유니크 해야 된다고 하지만 사실은 바깥 세계의 영향을 받을 수 있게 끊임없이 자신을 열어 놓아야 한다는 걸 이 전시회를 통해 느끼게 되네요. 항상 시그널을 주고받아야 변화할 수 있다는 거죠. 세잔·피사로전 같은 걸 보고나면 어떤 그림이 명작으로 후대에 살아남게 되나 하는 생각도 하게 되는데-.
헬렌 신 그림이 그려진 때의 시대정신을 잘 반영한 작품이 명작의 반열에 오르게 되죠. 역사를 바꾸는 그림이 있어요. 역사에는 흐름이 있고, 그림으로 역사의 흐름을 볼 수 있다면 그 그림은 역사에서 살아남는 그림이라고 할 수 있겠죠.
박혜숙 또 다른 면에서는 인간성의 최상의 미적 감각, 최고의 조화에 들어간 그림들이 명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지성과 감성이 가장 고양된 상태, 가장 명징한 의식을 보여주는 그림들은 시간을 뛰어넘고 살아남아 이처럼 오늘 우리 앞에 서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 세잔
▲ 피사로
비슷한 소재를 놓고 그린 세잔(1879~1880년)과피사로의 작품(1875년)
두 그림은 사물의 해석과 터치에서 확연하게 구별된다.
피사로의 대표작중 하나인 ‘붉은 지붕’. 1877년 작이다.
노년의 세잔 화풍이 잘 드러나는 ‘소나무와 바위’. 세잔이 58세이던 1897년에 그렸다.
■‘그림감상 어떻게 하나’ 두 화가에게 물었다
“작가에 대해 조금 알고 가도 좋고
마음 열고 느껴지는대로 보면 돼”
Q 컴맹 뿐 아니라 화맹도 많은데 그림은 어떻게 봐야 잘 보는 건가요?.
헬렌 신 작가를 조금 알고 가면 좋아요. 그러면 ‘저 그림을 왜 그리게 됐을까’하는 생각이 들게 되고, 자기 감정과 작가의 감정이 만날 수 있어요. 관람객의 미적 감각이나 감정이 그림과 부딪히게 되면 좋은 감상이 되는 거죠.
A 박혜숙 그도 저도 아니면 그냥 마음을 열고, ‘저 그림에서 무슨 느낌이 나나?’ 예를 들면 ‘피사로는 다정하고, 부드럽고, 평화롭구나’하며 공감하는 것은 어떨까요. 어떤 선입견을 갖지 말고 있는 그대로 느끼는 거죠. 전문가는 팔레트로 그렸나 등 부분부분을 따져보게 되지만 일반인이 그림을 즐기는 왕도는 일단 많이 보는 것밖에 없어요. 그러면 좋은 그림과 그저 그런 그림의 차이도 알게 되죠.
헬렌 신 세잔 & 피사로 전은 어렵지 않아요. 우리 주변에서 늘 보아오던 익숙한 그림들이니까요. 그러나 컨템포러리는 지나치게 오락적인데다 충격을 추구하기 때문에 감상법이 다르죠.
박혜숙 화가는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기 때문에 컨템포러리의 경우 자기가 아는 그림을 보러 간다고 기대하면 안되겠죠. 새로운 것을 굳이 이해하려 하지 말고, ‘새로운 것이 있고, 나는 그것을 경험하겠다, 접해 보겠다’는 마음으로 가면 되겠죠.
헬렌 신 컨템포러리도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어떤 필연의 소산이기 때문에 옛날 그림을 봐야 현대 회화도 이해할 수 있어요.
박혜숙 그림을 많이 보고, 그림을 좋아하게 되면 그 세계가 무궁무진해 삶에 새 기쁨 하나를 더하게 되죠. 그림에 호기심과 흥미를 갖는 게 좋은 그림 감상을 위한 첫 걸음이라고 해야겠죠.
한눈에 보는 세잔 & 피사로 전
장소
LA카운티 뮤지엄 (LACMA·5905 Wilshire Bl. LA)
전시기간
내년 1월16일까지
전시작
인상파 화가 폴 세잔과 까밀 피사로가 밀접하게 교유하던 1865~1885년의 두 사람 작품 65점. 대부분 풍경화로 정물 일부와 자화상 포함.
전시일정
피사로의 증손자로 뉴욕 현대미술관(MoMA) 큐레이터인 요아킴 피사로가 기획한 이 전시회는 6~10월 뉴욕전, 10월~1월 LA전에 이어 파리전을 갖는다.
LACMA 개장시간
월·화·목 정오~오후 8시/금 정오~오후 9시/토·일 오전 11시~오후 8시
입장료
어른 15달러, 65세이상 13달러, 17세이하 무료(단 877-522-6225로 사전예약해야 함).
티켓구입 및 문의 www.lacma.org 1-877-522-6225
<안상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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