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다. 그리고 어느새 11월이다. 세월이 무섭게 달려간다. 얼마 있으면 세밑이고, 분주함 가운데 한 해는 또 과거 속으로 사라질 테고….
가을이 흠뻑 묻어 있다. 그러나 황금 빛 풍요의 가을은 아니다. 잿빛 일색의, 무상의 가을이 라고 할까. 11월이란 달에서 느껴지는 가을이다.
11월이다. 그런데 감사절이 빠져 있다. 그 11월은 어떤 11월이 될까. “크리스마스도 없는 겨울만 계속되고 있다…” C. S. 루이스가 쓴 동화의 한 구절이 문득 떠올려진다.
겨울의 길목에 서 있는 계절, 그래서 가장 쓸쓸한 달이 아니었을까. 그 11월이 기쁨의 계절로 바뀐다. 감사절이 있어서다. 조락(凋落)의 계절이 소망의 계절이 된 것이다. 감사가 가져온 기적이다.
무엇을 감사할 것인가. 어김없이 다가오는 감사의 계절을 맞을 때마다 던져지는 질문이다.
“인생이란 짧아서 아름답다. 꽃도 그렇다. 영원히 피는 게 꽃이라면 아름답지 않은 것이다.” 9.11사태가 난 해, 그러니까 평범하던 일상이 무너진 그 해 미국의 한 여성 칼럼니스트가 쓴 글이다.
언제까지나 함께 있을 것으로 생각됐던 존재다. 그 존재가 어느 날 사라지는 상황을 경험하면서 때로는 지루하기조차 느꼈던 일상의 평온을 감사하지 못했던 걸 뒤돌아 본 글이다.
새삼 세상이 아름다워 보인다. 그리고 평범한 한 존재, 존재가 그렇게 귀할 수 없는 것이다. 존재에 대한, 또 소중한 평상에 대한 감사가 넘쳐 있었다.
사실 환경은 참담했다. 전쟁으로 많은 것이 파괴됐다. 오랜 내전의 결과 많은 과부가, 고아가 생겼다. 이 상황에서 감사절을 선포했다. 링컨 대통령이 추수감사절을 국경일로 선포한 배경이다.
풍성한 수확에 대한 감사도 감사다. 그러나 그 뿐만이 아니다. 엄혹한 현실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고 어려움을 기억하며 또 살아남게 된 섭리에 감사하자는 것 이다.
감사절은 그러므로 환경과 소유의 문제가 아니다. 믿음을 기반으로 하고 있고, 어려움 가운데에도 나누는 계절이다.
배반의 시대. 제목이 눈에 들어온다. 노벨 평화상을 받은 대통령 밑에서 도청이 마구 자행됐다. 그런 배반감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한 한국 내 논객의 한탄이다.
그 대통령도 배반을 당했다. DJ 정권시절의 전직 국정원장 두 사람이 불법 도청사건과 관련해 한날한시에 구속됐으니까. 한 마디로 배반의 악순환이 지배하는 게 한국 정치라는 거다. 왜 배반의 악순환인가.
철저히 부인된다. 아예 없었더라면 더 좋을 뻔했던 존재로 치부된다. 산업화 세대다. 그들의 눈물과 노고, 그리고 피로 세워진 대한민국이 배제되면서 그들은 저주의 대상이라도 된 것 같다.
형님 세대다. 부모님 세대다. 그런데 그들에 대한 이해나 배려 같은 건 찾아볼 수 없다. 그 비난과 원망과 저주의 손가락질이 외부로도 돌려진다.
맥아더를 전범으로 둔갑시켰다. 맥아더 때문에 통일이 안 됐고 6.25 동란 때 그토록 수많은 사람이 죽어갔다는 주장이다. 그 저주의 말은 또 부산에서 열린 APEC 대회를 향해 쏟아지면서 전도된 세계관이, 자학적 민족관이, 그리고 가진 자에 증오관이 어린이들에게 심어진다.
오직 원망과 비난뿐이다. 감사함은 그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다. 왜 배반의 악순환인가. 앞서 나온 질문의 답의 윤곽이 어느 정도 나온 것 같다. ‘감사함이 없으므로’다.
감사함이 없는, 다시 말해 ‘원망의 정치’는 자폐증세의 정치다. 원망은 기억해야 할 것은 잊고 망각해야 할 것만 기억하는 일종의 자아상실 증세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그 폐해가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한국은 프랑스 다음으로 향후 미국의 우방으로서 중요성이 떨어지는 나라다’- 최근 여론조사가 밝힌 미국의 외교안보 전문가들의 집약된 한국관이다.
한미 양국관계의 역사를 제 멋대로 망각하는 원망의 정치, 자폐증세의 정치에 대한 짙은 배신감이 이 같이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감사함으로 축복의 열매를 맺는 정치는 언제나 가능할까. 감사절에 던져보는 질문이다.
옥 세 철
논설위원
secho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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