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선전담 변호사 24시]
돈없고 ‘빽’없는 이들의 마지막 보루…생계형 범죄자 크게 늘어 안타깝기만
월 25건 처리…눈코 뜰새 없어도 보람
김좌진 국선전담 변호사가 재판이 시작되기 앞서 빈 법정에 미리 들어와 공소장 등을 검토하며 피의자에게 질문할 내용을 준비하고 있다. 이종철기자
‘무전유죄’라는 말이 ‘만인 평등’이란 법언을 무색케 하는 시대. 법을 몰라 억울하게 당하거나 돈이 없어 필요 이상의 형벌을 감수하는 사람들이 있다. 돈없고 빽없는 사람들의 ‘마지막 보루’인 국선변호사를 1박2일 동행취재했다. 형사사건만 맡고 있는 서울 서부지법의 김좌진(33ㆍ법무법인 청솔) 국선전담 변호사에게 하루는 24시간이 아니었다.
#15일 오후1시15분
서울서부지법 변호사대기실
노숙인처럼 보이는 허름한 행색의 노인이 머뭇거리며 들어선다. 술을 마시다 동네친구 얼굴에 맥주잔을 던지고 흉기를 휘두른 야간 상해 피의자 김모(63)씨. 첫 재판을 앞두고 갖는 첫번째 접견이다.
“맥주컵을 던진 게 아니라 술상을 밀어버리면서 깨진 물컵 파편이 튄 것이라니까요. 흉기도 그게…, 멱살을 잡고 숨을 못 쉬게 하니까 ‘차라리 나를 죽여라’ 그라믄서 갖고 온 것이어요.” 김 변호사가 한숨을 내쉰다. 증인이 있는데도 범행사실을 부인할 경우 불리한 판결을 받는다.
“야간 흉기는 형이 아주 세서 5년 이상 나올 거란 말이에요.” 김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김 변호사는 유ㆍ무죄 여부보다 피고인이 구속되지 않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수감생활이 두렵고 고통스러운 줄을 알기 때문이다. “자, 모두 인정하고 재판을 빨리 마치는 방법과 증인들을 찾아서 무죄를 입증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어요. 어떻게 하시겠어요?”이웃들 집에 미장일을 해주고 생계를 꾸려가는 김씨는 보증금 1,000만원에 월세 15만원짜리 단칸방에 살면서 관절염으로 거동을 못 하는 아내를 돌보고 있다. “던졌다고 하면 안 잡혀갈 수 있을까요? 진짜 던진 것은 아닌디….”이런 경우가 제일 난감하다. 그래도 피고인이 결백하다는데 믿을 수 밖에 없다. “그래요. 그럼 우리 무죄쪽으로 가 봅시다.”
#오후 2시30분
서울서부지법 406호 형사법정
사건번호 2005노XXX호. 생활비 때문에 카메라를 훔치다 구속된 절도 피의자 이모(27)씨의 항소심이다. 이씨 이름으로 사채를 끌어다 쓴 어머니 때문에 신용불량자가 된 그는 이미 동종 전과로 집행유예를 선고 받은 적이 있어 이번엔 실형이 불가피하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피고인은 어린 나이에 부모 때문에 생활불량자가 되고 그로 인해 직장에서도 해고되는 등 어려운 삶을 살아왔습니다. 본인의 죄를 모두 인정하고 깊이 뉘우치고 있는 점, 며칠을 굶으며 노숙을 할 정도로 생활이 어려웠던 점 등을 고려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김 변호사가 만나는 피고인들의 상당수는 이씨처럼 절도나 무전취식으로 들어오는 ‘생계형 곤궁범’들. 최근엔 차라리 하루 세끼 식사를 제공해주는 교도소에 가 있겠다며 일체의 진술을 거부한 사람도 있었다. “인생을 포기한 피고인들을 많이 만나요. 군대 가는 대신 징역 살겠다는 사람, 사람을 죽이고도 잘못한 게 없다고 우기는 사람…. 하지만 국가는 그들이 인생을 포기하게 내버려둘 수는 없습니다.”
#15일 오후 4시30분
서울 영등포구치소
구치소로 향하던 김 변호사가 휴대전화를 받고 버럭 소리를 지른다. “네? 도망갔다고요?” 내일 재판을 받아야 하는 피고인이 잠적했다. 불구속 피고인들의 소재지를 일일이 확인하는 것도 국선변호사의 주요 임무. 하지만 당장 또다른 접견이 예정돼 있다. 잠적한 피고인은 나중에 찾기로 하고, 차에서 내리자마자 접견실로 뛰었다. 이번 피고인은 사기 혐의자로 세번째 접견이다. 내일 재판을 앞두고 그동안의 변동사항이나 증인추가 사항 등을 확인하고 피고인이 묻고 싶은 질문도 신문항목에 추가했다.
국선전담 변호사가 월 평균 25건의 형사사건을 처리하고 한 달에 받는 세전급여는 625만원. 모아 놓으면 큰 돈 같지만, 건당 25만원 수준이다. 김 변호사는 “그래도 일반 국선사건 수임료 14만5,050원에 비하면 대법원이 전담변호사에겐 크게 인심 써준 것”이라며 웃었다.
#16일 오전10시
서울서부지법 303호 형사대법정
검사의 신문이 시작됐다. “공소장 받아보셨죠?” “네.” “공소사실 모두 인정하시지요?” “네.” 김 변호사가 미간을 찡그린다. 노인은 공소장이 뭔지, 공소사실이 무슨 말인지 모르고 있다. “피고인. 지금 맥주잔 던지고 흉기 휘두른 적 있냐고 물은 겁니다.” 노인은 그제서야 손사래를 치며 그런 일 없었다고 부인한다. 그가 “네”라고만 대답해도 되도록 김 변호사의 질문이 이어졌다. 검사는 김 변호사의 질문들과 노인의 “네”라는 답변을 들으며 그가 정말로 맥주잔을 던지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는 듯 했다.
전국 20명… 턱없이 부족
유명무실한 국선변호사제를 보완하기 위해 지난해 9월 도입된 국선전담 변호사제는 현재 서울중앙지법 등 11개 지방법원에 총 20명의 국선전담 변호사를 두고 있다. 대법원은 내년부터 전국 18개 지방법원 전체로 이 제도를 확대하고 인원도 40~50명으로 늘리기로 했지만, 형사사건의 70~80%를 국선변호사가 맡는 선진국과 비교하면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다.
김 변호사는 사건이 너무 많아 날마다 시간과의 전쟁이기는 하지만 보람만은 그 어떤 보너스와도 바꿀 수 없다며 사회복지체계가 제대로 갖춰져 가난 때문에 죄를 짓는 사람이 줄어들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국선변호사를 너무 ‘정의의 용사’처럼 그리지는 말아 달라는 당부를 마지막 인사에 덧붙였다.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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