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근대화 과정에서 도도한 외세의 파고를 한 몸으로 막고 서서 국운의 부침을 가장 극적으로 체현(體現)했던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의 난초그림을 108점이나 담은 국내 최대규모의 묵란화첩(墨蘭畵帖)이 발견돼 화제를 일으키고 있다.
‘석파도인유란도(石坡道人幽蘭圖)’라는 금박 제목이 박힌 이 화첩은 전체 10권으로 구성되어있는데, 신해혁명 후 중국의 교육총장을 지냈던 푸찡상(傅增湘)이 소장해오다, 최근 아직 미지의 경로를 통해 국내에 반입된 것으로 알려졌다. 석파는 대원군의 호다.
푸찡상은 중국 베이징의 골동품전문 상가인 류리창(琉璃廠)에서 난초 그림을 구입했으며, 후에 이들 난초가 흥선 대원군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고 표구해 가보로 전했다. 석파는 한 때 청나라 군에 납치되어 바오딩에서 유폐 생활을 한 적이 있는데 푸찡상이 수집한 난초 그림들은 이 때 그가 시름을 잊기 위해 그린 작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대원군은 조선시대에 왕위를 계승할 직계손이 없어 종친 중에서 왕위를 계승한 왕의 부친을 일컫는 칭호이다. 예를 들면 선조(宣祖)의 부친 덕흥(德興) 대원군, 철종의 부친 전계(全溪) 대원군, 인조의 부친 정원(定遠) 대원군, 그리고 고종의 부친 흥선(興宣) 대원군이 그 분들이다. 그러나 왕이 즉위했을 때 생존한 대원군은 흥선뿐이었다.
석파 이하응은 사도세자의 둘째아들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되었으나, 그가 12세 때 모친이, 그리고 17세 때 부친이 타계했다. 그가 사고무친으로 불우한 청년기를 보냈던 철종 치하에서는 안동 김씨가 권력을 독점, 왕실과 종친에 통제와 위협이 심했다. 그래서 석파는 호신책으로 파락호 생활을 하면서 난초를 그려 팔았고, 이게 그의 생계수단이 되었다. 물론 득세 후에도 틈만 있으면, 아니 틈을 내서 그는 붓을 갈고 난초를 쳤다. 그가 파락호 생활 중 겪은 체험이 집권 후 그가 과감한 개혁을 단행한 원동력이 되었다.
흥선 대원군은 1863년 12월 그의 아들 명복(命福)이 왕위에 오르고 신정왕후로부터 섭정의 대권을 위임받자, 서원 정리, 잡세 폐지, 법전 편찬 등 유례없는 개혁을 단행, 국가재정이 안정되고 일반 백성의 생활도 나아졌다. 그러나 그의 개혁정치는 기득권을 침해당한 양반과 유생(儒生)들의 저항에 부딪혔고, 특히 그의 경복궁 중건과 서구세력의 동점(東漸)에 맞선 쇄국정책, 그리고 천주교 박해는 심각한 국란을 초래했다.
그는 집권 10년 만인 1873년 11월 22세가 된 아들 고종과 특히 후에 명성황후가 된 며느리 민비의 성화로 대권에서 퇴출된다. 외척의 발호를 막기 위해 영락한 향반 영흥 민씨 가문에서 그가 직접 간택한 왕비의 계략으로 탄핵 상고를 받고, 그해 11월 창덕궁의 대원군 전용 출입문이 폐쇄되자, 대원군은 즉시 하야하여 양주에 은거했다.
그리고 다시 거의 10년이 지난 1882년 석파는 구식군대 폐지와 봉량미 문제로 임오군란이 일어났을 때 왕명으로 사태 수습을 요청받고 재집권한다. 하지만 민비의 요청으로 원세개가 이끄는 청국군이 개입함으로써 사태는 반전되어 대원군은 청국으로 연행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는 그 곳에서 무려 3년 동안 유수생활을 했던 것이다. 최근 서울로 반입된 석파난초도는 그 수집장소와 경위 등으로 보아 대원군이 이 때 그렸을 가능성이 높다.
1885년 2월 통상위원으로 부임하는 원세개와 같이 귀국한 대원군은 1886년 민비의 러시아와의 선린조약에 반대한 원세개와 결탁하여 재집권을 모색했으나 실패한다. 그리고 1894년 동학혁명 후에는 일본이 갑오경장에 간여하면서 대원군을 내세워 민비의 세력을 제거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대원군이 원세개와 귀국한 10년 후인 1895년에는 일본공사 미우라가 친러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일부 친일 정객과 음모하여, 일본 군인과 낭인들이 왕궁을 습격하고 민비를 시해한 뒤 정권을 탈취한 사건이 일어났다. 바로 을미사변이다. 민비는 후에 명성황후로 추서 되었다.
흥선 대원군은 민비의 서거 후 일시 재집권에 성공했으나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대피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 사태로 다시 실각, 양주로 낙향하여 1898년 7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다. 문자그대로 정말 파란만장한 풍운아의 일생이었다.
대원군의 묵란화첩의 발견소식을 접하고 우리 나라의 근대사를 한 몸으로 쓴 인간 이하응이 만일 난초에 심취하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 파란만장한 조선 말기의 격동과 부침에 매몰되어 이 같은 수(壽)를 누리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sLee-kpi@msn.com
이선명/KPI통신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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