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놀드 슈워제네거 주지사가 가장 싫어하는 말 중의 하나는 ‘정치가’일 것이다. 정치에 뛰어든지 2년이 지났는데도 그는 아직 자신을 정치가로 생각지 않는다. ‘정치가이기를 거부한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지난 3월 그가 MSNBC-TV의 정치분석 프로에 출연했을 때. 사회자가 물었다. “정치가가 된다는 게 어떤 겁니까?” 우리의 주지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주지사로서 나의 가장 큰 도전은 절대 정치가가 안되는 겁니다. 그러니 내게 정치가란 어떤 거냐고 묻지 마십시요. 난 정치가가 아니예요, 또 결코 되지도 않을 겁니다” 공개방송인 이 프로의 그날 방청객들은 스탠포드대학의 학생들과 교수들이었다. 사회자가 방청석을 향해 말했다. 슈워제네거를 정치가라고 생각하는 분은 손들어 보세요. 모든 사람이 다 손을 들었다. 사회자는 주지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이 틀렸어요” 폭소가 터졌다.
슈워제네거가 ‘참신한 아웃사이더’임을 내세워 주정부 입성에 성공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이미 2년이나 새크라멘토에서 ‘정치를 해 온’ 정치가이다. 부패하고 진부한 정치가인가, 정직하고 참신한 정치가인가의 평가만 남았을 뿐이다. 또 주민들도 그가 정치가인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이제 그만 영화 속의 허상인 ‘액션 히어로’가 아닌, 실생활의 난제들을 해결해가는 ‘유능한 주지사’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8일의 특별선거 결과가 이같은 주민들의 요구를 그대로 말해주고 있다.
‘그의 발의안’들은 모두 부결되었다. 그동안 여론조사가 그의 폭락한 인기를 경고했지만 슈워제네거 진영은 그건 유권자의 본심이 아니라고 주장해왔다. 마음 속 깊이에서는 ‘스타 주지사’를 응원하고 있다며 일시적 실망일 뿐 그가 성공하기를 기대한다고 주문을 걸어왔다. 그러나 이번 선거의 완패는 그들이 마법처럼 믿었던 스타성의 한계를 똑똑히 보여주었다.
사실 이번 선거는 그의 재임 2년에 대한 중간 평가의 성격이 짙었다. 투표에 회부된 주민발의안들은 하나같이 단순한 내용이 아니었다. 찬반 양쪽의 주장이 모두 일리가 충분했다. 게다가 이슈 자체는 일상에 영향을 주는 중요한 사안들이었다. 전문가가 아닌 일반 유권자들에겐 결정하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두려웠다. 투표가 끝난 후 슈워제네거가 좋아서 ‘예스’, 싫어서 ‘노우’를 찍었다고 털어놓은 유권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슈워제네거의 정치생명이 끝났다는 의미인가. 그건 너무 섣부른 진단이다. 체질적으로 패배에 익숙치 못하니 추스릴 기간이 남보다 오래 필요할지는 모른다. “며칠이면 승리도 패배도 다 지나가버린다”며 애써 담담하게 말했지만 불멸의 터미네이터에겐 충격적인 첫 참패였을 테니까.
하나의 선거가 끝나면 또 하나의 선거가 시작된다. 슈워제네거 주지사의 2006년 재선을 향한 캠페인도 첫발을 내딛었다. 쉽지는 않을 것이다. 상처투성이의 험난한 출발이다. 이번 선거에서 피흘리는 사투를 벌였던 노조부터 공개적으로 경고하고 나섰다. 자신들의 승리로 끝난 특별선거는 1회전에 불과했다며 “우리도 내일부터 2회전을 시작한다”고 슈워제네거 낙선 캠페인 돌입을 선언했다. 재선을 앞둔 현직은 가뜩이나 눈치 볼 게 많은 법인데 낙제에 가까운 중간성적표까지 받았으니 주지사의 입지는 바닥을 친 셈이다. 지난 2년동안 그가 만만하게 대했던 민주당 의원들이 이번엔 그를 타협상대로 얼마나 존중해 줄지도 미지수다.
이 모든 어두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슈워제네거가 활기를 되찾아 재도약할 여지는 충분하다. 그의 인기는 아직 살아있다. 여전히 사람들은 그를 좋아하고 싶어한다. 좋아하니까 용서해주고 싶어한다. 민주당이 카리스마와 지명도가 확실한 후보를 내세우지 못한다면 재선의 승산은 그에게 있다.
이번 패배의 원인을 추적해보면 새 출발할 방향도 확실해 진다. 우선 대중의 인기에 집착하는 스타의식은 이제, 아쉬워도 버려야 할 때다. 충실한 주지사로 탈바꿈하면서 자신이 ‘정치가’임을 인정해야 한다. 정치는 상대적이다. 반대편과 협조하고 타협하며 합의를 이루어 내 민생의 문제를 해결해 주어야 한다. 그것이 유권자들이 정치가에게 바라는 전부다. 자신이 속한 공화당 보수우파와만 눈 맞추지 말고 민주당, 무소속과도 2년전 처럼 손을 잡으며 중도파로서의 온건한 이미지도 되찾아야 한다. 그가 다시 한번 초당적 리더가 되려는 노력을 보인다면 여론의 방향도 바뀔 수 있다.
이번 선거에서 패배가 확정된 후 그가 한 첫말은 “보다 더 초당적 협조에 노력하겠다”는 약속이었다. 그것이 자신의 정치방향을 바꾸겠다는 다짐이라면 그의 새 출발은 상당히 희망적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박 록
주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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