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처서도 지나고, 계절은 가을을 향해 가고 있다. 아직 한낮의 더위는 마지막 남은 기를 다 쏟느라 기승을 부릴 때도 있긴 하지만, 그러나 아침저녁의 삽상한 바람 속에 가을이 묻어난다. 아니 오늘 아침 갑자기 뿌린 비를 피해 워싱턴 포기바텀의 후미진 샛길을 잰걸음으로 지나친 콜로니얼 풍의 고옥들 사이로 비켜선 정원에는 이미 가을이 와 있었다.
여름은 이제 일상을 벗어 던지고 내닫던 해변과 계곡 등지에서 꽃피우던 낭만을 추억이란 이름으로 밀어내며 조금씩 물러서고 있다. 때가 되면 어김없이 제 길을 찾아가는 자연의 이치에 한낱 인간이 어찌 제동을 걸 수 있으랴. 하여, 이 세속의 도시에도 가을은 어김없이 찾아든다. 창문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밤바람은 달짝지근한 향기를 동반하고 있다.
오늘 귀가 길에 꽃가게에 들렀다. 거기에 꽃의 천국이 있었다. 안개꽃, 장미, 달리아, 백합, 카네이션, 히아신스... 낯익은 것들부터 이름조차 생소한 꽃까지 별의별 게 다 있다. 그러나 반가운 건 역시 미당 서정주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 같은 꽃”이라고 노래한 국화다. 서늘한 바람과 함께 단아한 꽃을 피우는 국화에서 사람들은 으레 가을을 느끼게 마련이다. 적어도 우리 한인들은.
“찬 바람이 불면 소국(小菊)의 색깔은 더 예뻐질 겁니다.” 내가 국화를 좋아하는 걸 아는 꽃가게 주인은 이렇게 말하며 국화를 한아름 싸준다. 그렇지. 비닐하우스가 생기고 화초 재배 기술도 발달해 식물들이 제철을 잊은 지 오래인데도, 본색(本色)의 진가는 역시 제 철에 발휘된다는 사실을 그녀는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키 브리지 아래로 포토맥 강 가운데 길게 누운 루스벨트 섬을 온통 뒤덮고 있는 숲은 그 파랗다 못해 검푸르게 보이던 초록빛이 세월의 재촉에 밀려 불과 한두 주 사이에 가을 준비에 나선 것 같다. 아니 내년 봄을 위한 월동의 채비일 지 모른다. 워싱턴 하버를 가득 메우던 날렵한 보트들의 경쟁적 과시와 태양족들의 모습이 현저하게 줄어든 것도 계절의 순환과 무관할 수 없으리라. 금년 유난히 폭염을 쏟아 붇던 염제(炎帝)는 기어이 카트리나 여신의 노여움을 폭발시키고는 이제 쫓기 듯 저만치 그 그림자를 감추고 있다. 흔히 말하는 천고마비의 계절, 가을이 왔다. 어느 시인은 가을은 오동나무 잎이 떨어지면서부터 시작된다고 노래했다.
오동나무 잎 하나 떨어져, 천하의 가을을 알 수 있다(梧桐一葉落, 天下盡知秋).
봄을 소생의 계절이라고 한다면, 가을은 조락(凋落)의 계절이다. 조락에는 반드시 애상(哀傷)이 따르게 마련이고, 그래서 가을은 애상의 계절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때문일까.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가을을 노래한 시는 한결같이 애달프고 또한 허허하다.
가을 바람 불어/ 흰 구름 날아가고/ 나뭇잎 떨어져/ 기러기 남으로 가네.
한무제(漢武帝)의 저 유명한 추풍사(秋風辭)의 한 구절이다. 선조 때의 시인 정용(鄭鎔)도 가을의 애상을 이렇게 노래했다.
국화 꽃은/ 빗 속에 시들어 가고/ 가을 바람 뜰에 불어/ 오동잎 진다// 이 아침에/ 슬픔이 새삼스러워/ 꿈 속에 노닐던/ 그 곳/ 마냥 그립네.
고향 생각이 문득 떠오르며, 불현 듯 송강(松江) 정철(鄭徹)의 추야(秋夜) 라는 시가 연상된다.
옥수수 나뭇잎 지는 소리에/ 성긴 비가 오는 줄로 잘못 알고/ 아이더러 나가 보라 이르니// 달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다네.
가슴 속에 쌓여 있는 세진(世塵)을 깨끗이 떨쳐버리고 싶다. 무아(無我)의 세계는 바로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데 세속은 왜 부질없이 지나친 욕망에 사로잡혀 아웅다웅하는 걸까. 좀 더 초연하고 싶은 마음도 저 푸른 하늘 때문일까.
아, 이 잠 못이루는 가을 밤 옛 시인들의 시을 읽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당(唐)의 시인 잠삼(岑參)이 멀리 헤어지는 벗과 나누는 마지막 술잔을 기울이며 읊조린 노래를 읽는다.
술잔 마주해/ 가만히 아무 말 못하고/ 그대 전송함을/ 슬퍼하노라/ 창파가 몇 천리인가/ 뭇 공경들이/ 대궐에 가득하거늘/ 홀로 떠나/ 회수를 지나다니/ 옛집은 부춘의 물가/ 늘상 강다락에 누웠던 일이/ 생각나던 참/ 그대가 가려 한다는 말을 듣고/ 남쪽 서주를 자주 바라본다오/ 외진 골목에 홀로 문 닫아 걸고/ 차가운 등만/ 깊은 집에 고요해라/ 북풍은 싸락눈을 불어오는데// 그대 가서/ 경구에 이르면/ 바로 복사꽃 시절이리라/ 배 안에선/ 혼자만의 흥취를 담뿍 누리고/ 호수에서는/ 새로운 시를 많이 얻으려니/ 황학이 나는 것은 늦지 않으리.
백년을 다 못 사는 주제에 천년의 근심을 안고 살아가는 (生年不滿百, 常懷千年優)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sLee-kpi@msn.com
이선명/KPI통신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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