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로브가 조지 W. 부시를 처음 만난 것은 1973년 추수감사절 날 기차역에서였다. 공화당 대학생회의 회장으로 일하며 친해진 아버지 부시의 부탁으로 그의 아들에게 자동차 열쇠를 전해주러 간 것이다. 청바지에 공군자켓 차림의 하버드 대학원생 젊은 부시가 걸어 나왔다. 자신감과 카리스마에 찬 그를 첫 대면하면서 청년 로브는 대통령이 되겠다는 자신의 야망을 접었다. 정치가로서의 부시의 잠재력을 직감적으로 알아낸 것이다. 지난 32년간 두 사람은 때로는 형제처럼, 때로는 친구처럼, 또 때로는 주인과 하인처럼 단단히 묶여져 지금까지 변치않는 서로에 대한 충성을 유지해 왔다.
정치철학에서부터 행정정책까지 정치가 부시의 경력을 설계해 온 사람도 로브다. 로브는 강력한 리더 부시의 위상 세우기에 전력을 기울였고 부시는 로브의 가이드를 1백% 신뢰해왔다. 이들의 불가분의 관계는 지난해 다큐멘터리로 제작되기도 했다. 제목은 ‘부시의 두뇌(Bush’s Brain)’. ‘생각은 로브가 하고 행동은 부시가 한다’ ‘로브는 미국의 공동대통령’등의 일부 내용이 지나치긴 하지만 부시에게 로브가 어떤 존재인가를 잘 말해주고 있다.
정치자문의 길을 택해 지금까지 41번의 선거전에 참모로 뛰면서 37승을 이끌어낸 로브는 선거판의 귀재로 불리웠다. 부시의 두 번의 주지사 당선과 두 번의 대통령 당선의 주역이 로브였음은 물론이다. 정치에 대한 뜨거운 열정, 치밀한 연구와 조사등이 강점인 그의 정치전략 중 하나는 상대에 대한 가차없는 공격이다. 모든 사람이 동지 아니면 적이다. 그리고 적은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다. 적을 죽이기 위해선 사실여부와 상관없이 흑색선전도 마다않는다.
이처럼 무자비한 사냥군 역할에 익숙해온 그가 요즘은 사냥감이 되어 전전긍긍하고 있다. 이른바 ‘리크게이트’에 걸려든 것이다.
CIA 비밀요원 신분 누설사건인 리크게이트도 당하면 몇배로 갚는다는 오만한 강성의 부작용인 셈이다. 2003년 7월 전이라크대사 조셉 윌슨이 뉴욕타임스에 이라크전 비판 내용의 기고를 보내면서 사건은 시작되었다. 윌슨은 자신이 아프리카 현장에 가서 조사한 결과 이라크 공격의 명분으로 내세운 ‘후세인의 핵무기 제조용 우라늄 구입 시도’ 정보는 거짓이라고 폭로했다. 분노한 백악관은 보복에 나섰다. 윌슨의 아프리카행은 CIA 요원인 윌슨의 부인 발레리 플레임이 주선했다는 내용을 익명으로 언론에 흘렸다. 아내 덕으로 일거리를 맡은 ‘변변치못한’ 윌슨을 창피주기 위한 의도였다. 그러나 사건의 파장은 의외로 커졌다. 정보요원 신원보호법 위반이 적용된 것이다. 특별검사가 지명되고 22개월에 걸친 수사과정에서 익명의 제보자는 백악관 비서실 차장 칼 로브와 체니 부통령의 비서실장 루이스 리비로 드러났고 처음 제보자 공개를 거부한 뉴욕타임스의 기자는 85일간의 옥고까지 치루었다.
지난 주말까지 로브도 벌써 4차례나 연방대배심에 나가 증언했다. 처음엔 플레임의 신원을 말한적 없다고 했다가 기자의 증언과 어긋나자 나중에야 기억난다고 정정하기도 했다. 특별검사 패트릭 피츠제럴드는 28일 대배심의 임기가 만료되기 전까지 수사를 종결할 것으로 보인다. 요즘 워싱턴정가의 최대 관심사는 매일 뉴스의 각광을 받고있는 해리엇 마이어스의 연방대법관 지명도 아니고 이라크 헌법안 가결 전망도 아니다. 칼 로브의 기소 여부다. 기소되면 아무리 ‘최고의 실세’ 로브라 해도 사임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미 후임자 물색에 들어갔다는 귀엣말들과 함께 갖가지 예상과 분석이 조용하게, 그러나 다양하게 오가고 있다. 로브의 사임은 백악관, 나아가서는 워싱턴 세력판도의 적지않은 지각변동을 뜻하기 때문이다.
로브 없는 백악관, 로브 없는 부시는 상상하기 힘들다. 그가 떠난 자리엔 ‘결코 메꾸지 못할 블랙홀’이 생길 것이며 ‘부시행정부의 상징적 폐막’이라는 극단적 비유도 등장했다. 타이밍도 나쁘다. 카트리나 부실대응으로 정신없이 얻어맞은데 이어 탐 딜레이등 공화당 중진들의 윤리 파문, 여전히 수렁에서 허우적대는 이라크전, 폭등하는 유가, 당내 반발을 부른 해리엇 마이어스 연방대법관 지명까지…산넘어 산, 설상가상의 형편이 그의 과감한 결단력과 추진력을 그 어느 때보다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비밀요원의 신원 누설은 중대한 위법행위지만 모든 법에는 구멍이 있기 마련이고 이번 역시 예외는 아니다. 실제로 위법을 입증하기도 쉽지않고 애초 고의적 불법행위라기보다는 정치판에서 흔한 혼내주기에서 비롯된 것이니 비열한 수법이긴 하지만 범죄는 아니라는 시각도 적지않다.
미 주류언론들은 아직도 ‘리크게이트’란 표현을 쓰지 않는다. 대형 정치스캔들에 붙여온 ‘…게이트’의 명칭을 붙이기에는 위법여부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황은 별로 희망적이 못된다. 다음 주 수사가 마무리되면 무혐의 처리보다는 위증이나 사법방해 혐의로라도 기소될 것이라는 전망이 지금 현재론 다소 우세하다.
‘누설자는 해고시키겠다’는 자신의 공언에 발목잡힌 부시가 정말 로브 없는 집권2기를 꾸려가야 하는 것이지 풍전등화에 처한 ‘로브의 백악관’은 겉으론 태연한척, 그러나 안으론 초조하게 내주 피츠제랄드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
박 록 주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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