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키의 가을을 절정으로 이끄는 애스펜 트리
‘콜로라도 스프링스’
소설가들의 2박3일
떠남을 결행한 건 가을바람 때문이었나 보다. 늘 따가운 캘리포니아의 햇빛 속에서도 슬그머니 가을이 왔음을 전해주는 그 소슬한 바람에 미주 소설가 몇 명은 드디어 바람이 났다. 10월 7일 이른 아침 2박 3일 거리의 짐을 꾸려 각자 집을 나선 이성열, 조정희, 박경숙, 홍미경, 박인순 소설가와 서울에서 초청된 경희대 김종회 교수는 엘에이 공항에서 합류하였다. 아마 그 시간쯤 메릴랜드에 거주하는 최영숙 소설가도 부푼 마음으로 길을 떠났을 것이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콜라라도 덴버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반가량 떨어져 있다는 ‘콜로라도 스프링스’라는 도시였다. 2년 전까지만 해도 북가주 샌호제에 거주하며 활발하게 문학활동을 해오던 전지은 소설가가 남편의 사업 때문에 훌쩍 콜로라도로 이주해 버린 뒤 그녀는 늘 우리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짧지 않은 세월동안 문학모임에서 간간이 만나오던 사이였지만 그렇게 모여 같이 떠나기는 처음, 덴버행 비행기에 오르는 우리의 얼굴은 조금 상기된 채였다.
애스펜 트리가 노랗게 물들고, 가을 로키에는 10월의 정취가 깊어가고 있다. 문우 전지은씨의 집을 찾아 콜로라도 스프링스로 즐거운 주말 나들이를 나선 문인들. 왼쪽부터 소설가 홍미경, 평론가 김종회, 소설가 전지은·박경숙·이성열·박인순·최영숙·조정희씨.
첫째 날
한밤중에 시작된 유흥시간에
저마다 열창과 몸을 흔들며
체면의 껍질을 벗어 던졌다
2시간이 채 못 걸려 도착한 덴버공항엔 전지은 소설가 부부가 기다리고 있었다. 반가움에 서로 얼싸안고 인사를 한 뒤 우리는 두 대의 자동차에 나누어 타고 전지은 소설가의 성채(?)가 있다는 콜로라도 스프링스로 향하였다. 캘리포니아의 프리웨이에 비하면 한산하기만 한 길, 자동차는 조금씩 고산지대로 오르기 시작했다. 슬그머니 귀도 멍멍해오고 경미한 구역질이 치미는 고산증상이 느껴졌다. 갈수록 더 한적해지는 길을 따라 한참을 달렸을 때 과연 숲속엔 산장처럼 고적하고도 우아한 느낌의 집 한 채가 서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니 무엇에든 똑 소리가 나는 전지은 소설가가 그 큰집을 자기 생긴 것만큼 단정하게 가꾸어 놓은 것이 느껴졌다. 미끄러질 듯 반짝거리는 홀웨이를 거쳐 여자 소설가 넷은 이층의 두 방으로 나뉘어 짐을 풀고 김종회 교수와 이성열 소설가는 서재가 딸린 맨 아래층에 방을 정했다. 그러니까 총 3층으로 된 그 집의 중간층엔 으리으리한 부엌과 다이닝룸, 그 미끄러질 듯한 홀웨이 끝엔 매스터 베드룸과 리빙룸이 있었다.
비행기 안에서 칩 한 봉지로 점심을 때웠던 우리는 다이닝 룸에 차려진 화려한 음식에 당장 군침을 삼켰다. ‘떡 벌어지는 한 상’이라는 말은 바로 이럴 때 쓰는 것일까. 음식은 100퍼센트 홈 메이드였다. 저녁을 먹기엔 조금 이른 시간이었지만 우리는 식탁에 둘러앉아 붉은 포도주가 찰랑대는 잔을 들고 서로 부딪쳤다. 창밖엔 야산에 이어진 그 집의 뒤뜰 끝이 자연림으로 언덕지고 거기 가득한 가을 속으로 조금씩 해가 내려앉고 있었다. 가을 풀빛과 지는 햇살 그리고 포도주의 붉은 빛이 교묘히 조화를 이루며 우리의 가슴으로 다가오고 혀에 착착 감겨오는 주인마님의 음식솜씨는 과연 일품이었다. 강사로 초빙된 소설 평론가 김종회 교수는 어느 틈엔가 좌중을 압도하며 그 넘치는 지식과 유머의 골목을 바삐 오가기 시작하고 우리는 음식을 삼키며 까르르 넘어가는 소리들을 냈다.
그 자리엔 전지은 소설가가 함께 하는 일명 콜로라도 스프링스 한인 문학클럽(?)의 오영희, 김은주, 이종진씨 등이 자리를 함께 했다. 또 한 명의 회원인 김윤미씨는 바로 며칠 전 출산을 한지라 같이 하지 못함이 안타까웠다.
비교적 한인인구가 한산한 그 지역에서도 문학에 대한 열정을 태우는 그들은 명문대에서 국문학을 전공했거나 또는 교육학을 전공한 사람들이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맨 아래층 서재에서 본격적인 문학강연이 시작되었으나 매릴랜드의 최영숙 소설가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벽난로는 주황빛 불길을 넘실대며 타들어가고 창밖은 점점 새까매져 갔다.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단순하나 단순치 않은 주제로 시작된 김종회 교수의 강연은 창밖의 어둠과 비례하여 더 깊어지고 결국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는 가운데 자기만의 독창적 발상을 지닌 작품이 탄생되어야 한다는 것에 이르렀다.
강의가 마무리되고 나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드디어 매릴랜드의 최영숙 소설가가 나타났다. 홀로 그 밤길을 헤치고 멀리서 날아온 그녀의 열정이 실로 대단하기만 했다. 그녀에 대한 환영의 뜻 인 듯 갑자기 자리는 활기를 띄고 풍작풍작 가라오께가 울리기 시작했다. 이 귀한 시간에 어찌 추억을 만들지 않을쏘냐. 늘 애교 넘치는 미소로 재미소설가협회를 빛내는 홍미경 소설가가 첫 번째로 마이크를 잡고 율동을 곁들여 그녀의 18번 ‘보고 싶은 얼굴’을 열창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뻣뻣한 분위기가 잘 풀리지 않자 우람한 몸을 앞 뒤 좌우로 흔들며 ‘아빠의 청춘’에 온 힘을 다하는 우리의 김종회 교수님, 생각보다 노티나는 곡을 선정하여 부르는 것이 좀 의아했지만 어쨌든 그로 인해 그 서재에 열기가 번질 즈음, 느닷없이 일어나 막춤에 돌입한 최영숙 소설가… 요조숙녀처럼 얌전한 그녀의 모습에 전혀 상상하지 않았던 신나는 율동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온몸을 비틀며 깔깔대던 우리는 열정 없이 어찌 소설을 쓰리라며 하나 둘 일어나 나름대로의 막춤 추기에 몰입했다.
등 뒤로 긴 머리카락을 얌전히 늘어뜨린 콜로라도 문학클럽의 김은주씨가 날씬한 몸매로 마이크를 잡자 거의 전문가 수준의 ‘J에게’가 열창되었고 집주인 전지은 소설가부부의 뚜엣은 실로 환상이었다. 잠시 눈을 붙인다며 침실로 들어갔던 이성열 소설가가 뛰쳐나와 물레방아 도는 데를 뽑고 갓 서른 살의 새댁 막내 박인순 소설가의 랩송, 새침하게 앉았던 박경숙 소설가도 소프라노 한곡을 뽑았다. 문학속의 결속도 좋았지만 깊은 밤의 열창은 한 겹 체면의 겉껍질을 벗겨내며 우리를 더 가깝게 해주었다. 끝까지 우아한 미소로만 조용히 앉았던 우리의 리더 조정희 소설가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한 곡조를 뽑고 콜로라도의 첫밤은 유쾌하고도 정답게 깊어갔다.
산 정상의 만년설은 황금빛 애스펜나무 숲과 황홀한 조화를 이루고…
둘째 날
창밖의 어둠이 깊어갈수록
문학강연의 열기 뜨거워지고
산속에서 만난 호수는 영혼의 찌든 때 씻겨주고
콜로라도 스프링스 인근의 산정 호수.
짧은 잠 뒤에 눈을 뜬 이튿날 아침, 일행은 다시 두 대의 자동차를 나누어 타고 하이웨이 24번으로 진입했다. 콜로라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애스펜’과 다시 국도 82번으로 이어진 좁은 산길 인디팬던트 패스(independent pass) 곳곳엔 노란 잎사귀들을 흔드는 애스펜 나무와 산정상의 만년설이 교묘히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환상의 경치들을 스쳐가는 자동차 안에선 다시 김종회 교수의 유머 강연이 펼쳐지고 생소한 넌센스 퀴즈에 배를 잡고 우리는 다시 깔깔대기 시작했다. 고국을 떠나 사는 우리는 사실 서울의 빠른 언어회전 속도에 둔감해 있었다. 비록 우리가 모국어로 문학작업을 하면서도 말이다. 김 교수의그 유머성 언어순발력은 신선한 웃음을 자아내고 우리를 깜짝 놀라게도 했다.
하얗고 가느다란 몸통에 노오란 잎사귀 하나하나가 햇살처럼 흔들리는 애스펜 나무는 마치 온몸 구석구석에서 사랑의 교태를 뿜어 올리는 요염한 여인의 자태를 보고 있는 듯 고혹적이었다. 단풍철이 조금은 지난 터라 벌써 잎을 떨군 애스펜 나무군이 하얀 가지로 빽빽이 선 한쪽 숲은 오히려 노란 단풍 숲 보다 더 은은한 환상을 자아내고 있었다. 이 산길의 한 지점에서 만난 콘티넨탈 디바이드(continental divide)는 캐나다에서 멕시코까지를 잇는 3100마일 북미대간(北美大幹) 중 하나였다. 정상 가까이 한 지점에서 잠시 하차한 우리는 싸늘한 바람에 목을 움츠리며 13000feet 정상을 향해 올라갔다. 고산지대의 희박한 산소밀도에 숨을 헉헉대며 오른 정상 전망대엔 만년설을 꼭대기에 인 우람한 산이 펼쳐지고 차가운 바람 속에 머리카락을 날리며 카메라 앞에 선 우리는 모두가 환한 미소로 생의 한 장면을 추억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곳에서 다시 82번 도로를 타고 들어선 아름다운 도시 애스펜은 침엽수와 노오란 애스펜나무 군락이 교묘히 대조를 이룬 산에 둘러싸여 있었다. 뾰죽한 침엽수림은 저 혼자 잘나지 않고 연약한 잎사귀를 흔드는 황금빛 애스펜나무 숲과 함께 함으로 더 푸르고, 애스펜 나무는 침엽수림 사이에 집단을 이룸으로 더 황홀했다. 사람도 어찌 이와 같지 않으랴. 나와 다른 남과 함께 있음으로 내가 빛나고 나와 다른 그는 나로 인해 더 아름답다는 것을… 그 절묘한 조화에 둘러싸인 자그마한 도시 애스펜은 한창 가을이 익어가고 있었다. 주말의 관광도시인 만큼 주차공간을 찾지 못해 몇 번씩 같은 길을 오간 끝에 겨우 차를 세운 우리는 애스펜 낙엽을 주워들고 그곳 맥도널드에서 점심허기를 면했다.
애스펜에서 국도를 벗어나 머룬 벨스 마운틴(Maroon Bells mountain)으로 향했다. 산길 곳곳에 선 애스펜 나무는 한국에서 사시나무로 불리는 백향목의 일종이었다. 사시나무처럼 떤다는 말을 흔히 들어왔지만 실지로 마주친 애스펜 잎사귀는 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제 온힘을 다해 세상을 향한 노래를 부르고 있는 듯 했다. 잎사귀 하나하나를 흔들어 나무전체를 교향악처럼 울리는 그 무성의 연주는 우리의 나태한 영혼을 가만히 흔들고 있었다.
산길 끝에서 마주친 호수는 멀리 만년설을 줄무늬처럼 인 웅장한 산을 배경으로 노오란 단풍 숲에 둘러싸인 채 푸르게 출렁였다. 우리는 아름다운 자연경관 앞에 아이가 된 듯 서로 까르륵대며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고 호수의 물살에 조금은 찌들었던 마음 한구석이 하얗게 씻겨나가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 호숫가에 더 머물고 싶은 아쉬움이 있었지만 다시 먼 길을 돌아가야 하기에 되짚어 오는 길에 우리는 가장 아름다운 애스펜 나무가 있는 지점에 차를 세우고 겁도 없이 2차선 도로 한가운데서 사진을 찍었다. 애스펜 나무의 소리 없는 교향악은 하얗고 엷은 구름이 번진 하늘로 울려 퍼지고 우리는 점점 더 어린아이 같은 표정들이 되어갔다.
세상이 저 한 그루의 나무와 같다면 우리는 단지 저 가지 끝에 연약하게 흔들리는 하나의 잎이라…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세상의 가지 끝에 매달린 하나의 잎사귀들이 되었다. 바람에 흔들리며 햇빛에 반짝이다 때가 되면 떨어져 누울 그 잎사귀처럼…
하이웨이 70번을 갈아타고 덴버시내를 거쳐 돌아오는 긴 시간의 드라이브는 자동차 안의 즐거운 재담에도 조금씩 지쳐만 갔다. 집에 도착한 시간은 밤 11시가 넘었지만 우리에겐 다시 과제가 남아 있었다. 윤흥길의 ‘장마’와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 대한 토론을 위해 다시 서재에 모여 앉고 지칠 줄 모르는 김종회 교수의 열정적 강의는 새벽 1시가 되어서야 끝났지만 콜로라도의 마지막 밤을 지새울 듯 도란도란 대화가 이어져 갔다. 우리는 각자의 껍질이 가려운 듯 조금씩 벗어나가기 시작했다.
놀러 왔다고 하냥 놀 수만 있나. 식탁에 앉아 도란도란 나누는 고담준론은 그대로 문학원론이 된다.
셋째 날
충혈된 눈으로 맞은 콜로라도의 두 번 째 아침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부슬거리는 빗속 흐릿한 가을빛을 음미하며 다시 덴버공항으로 향하는 길가 산등성이엔 비안개가 걸리고 우리는 찾아올 때보다는 한결 가라앉은 마음이 되어 돌아가고 있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늘 가슴에 담겨있던 날씨앗 하나가 발효되고 숙성되어 그 씨앗 끝에 가느다란 싹이 터오르는 듯 뭔가 아픈 쾌감이 싸르르 전해져 왔다. 조금은 적요해진 가슴으로 돌아가는 우리에게 언제가 이 여행의 추억이 한 편 소설로 열매 맺힐 날 있으리라. 아 잊지 못할 그 애스펜 잎사귀의 떨림이여! 그 속에 남모르게 울려오던 우리 가슴의 떨림들이여!
■콜로라도 스프링스의 전남인·지은 부부
본래 간호사인 전지은 소설가와 서울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한 전남인 박사는 산호세에서 안정적인 생활을 하던 중 우연히 콜로라도로 이주하게 되었다.
덴버인근 마니토우 스프링스라는 곳엔 1884년부터 여러 가지 질병에 효과가 있다는 광천수가 개발되었다. 그러나 1940년 이후 방치되어 있다가 약사이며 평소 대체의학에 관심이 많던 뉴욕의 권오윤씨가 20년을 공들인 끝에 2003년 이 마니토우 스프링스 광천수 개발권을 사들였다. 그리고 그 관리권이 그의 인척인 전남인 박사에게 맡겨졌다.
이로 인해 뜻하게 않게 캘리포니아에서 콜로라도로 이주하게 된 이들 부부는 지난 2년여 동안 새로운 땅에 잘 적응해 왔다. 쾌적한 공기 속에 자리한 그들은 저택은 아름답지만 눈이 심하게 내리는 겨울날엔 며칠씩 집에 갇혀 외롭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낯선 지역에서 조금씩 이웃을 형성해 가고 미네랄이 풍부한 마니토우 스프링스는 미전역으로 출시되고 있다. 100년 전만 하더라도 의사의 처방이 있어야만 살 수 있었다던 이 귀한 약수는 결국 60여년 만에 한인에 의해 재생산되기에 이르렀다. 전남인 박사는 이 광천수의 효과와 함께 그 역사를 보존하고 알리고자 하는 마음이 크다.
글·사진
소설가 박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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