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과 생각
▶ 한현숙/ 워싱턴 여류수필가협회
‘상주 참사’- 신문에 큰 활자로 인쇄되어 있는 기사를 읽으며 가슴이 철렁함을 느꼈다. 상주는 늘 가슴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내 어린 시절의 고향이다. 상주에서는 초등학교 3년 다닌 것이 고작이다. 하지만 그 3년의 짧다고 생각하면 짧은, 또 어린 시절을 기억하면 얼마나 기억하랴 무심히 말할 수도 있을 그 곳에 대하여, 사실은 내가 태어나고 자란 대구보다 더 애정을 갖고 늘 아스라한 기억을 더듬으며 그리워하며 살았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그때만 해도 상주는 시가 아닌 조그만 읍이었다. 상주읍.
내 고향 상주는 그다지 높지 않은 정겨운 산과 작은 내가 있는, 언제나 나에게는 외할머니의 품 같은 느릿한 편안함을 주는 그런 곳이다. 추운 겨울 나지막한 초가집 담벼락에 기대어 서면 눈이 녹아 길게 늘어진 고드름이 바로 내 눈앞에 있었다. 손을 뻗쳐 고드름을 따면 그 차가운 얼음이 금방 장갑 벗은 따뜻한 손안에서 곧 뚝뚝 물방울이 되어 떨어졌다. 녹기 전에 입에 넣으면 짜릿한 그 차가움! 아! 그 정경을 어떻게 미국에서 태어난 내 아이들에게 설명하랴.
봄이 되기 전의 체육시간은 늘 학교 주위에 있는 밭에 일렬로 죽 서서 보리밟기를 하였었다. 누구의 밭인들 상관하랴. 학교 근처의 논과 밭은 어린 학생들과 선생님들의 발 밑에서 봄을 준비하고 있었다. 열심히 밑만 보며 밭을 밟다가 눈을 들면, 어느 순간 아지랑이가 따뜻한 봄 햇살 아래 실 같이 아른아른 오르고 있었다.
아지랑이가 오르면 곧 보리밟기는 끝나고, 이제는 동네의 처녀들은 너도나도 대바구니 옆에 끼고 야산으로 쑥이랑 냉이를 캐러 나섰다. 아직도 차가운 봄바람에 머플러로 얼굴을 감싸고는 한나절을 꾸부리고 앉아 나물을 캤다. 바구니에 가득한 나물을 손으로 한 줌 집고 코를 대면서 그 향긋한 향기에 지긋이 눈을 감았다가 뜨면 보이는 것은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이었다.
몇 번 쑥떡을 먹다 보면 어느새 냇가의 키가 큰 미루나무 잎들이 햇빛 속에서 반짝이는 여름이 되곤 했다. 얕은 냇가에서 풍덩 풍덩 뛰어다니며 아이들과 함께 송사리를 쫓아다녔고, 그러다가 엄마들이 반듯한 돌을 골라 빨래 방망이로 열심히 두들기며 빨아둔 빨래 함지를 엎은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우리 집 둘레의 열두 그루 감나무에 감이 발갛게 익기 시작하면 학교 운동장에는 만국기가 펄럭이는 가을 운동회가 있었고, 나는 문예반 이무일 선생님을 따라 몇 안 되는 문예반 학생들과 같이 김천이나 점촌에서 펼쳐지는 백일장으로 향하였다. 장소는 주로 절이나 포교당이었다. 싸리 빗자루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는 깨끗하게 쓴 넓은 황토 마당에서 원고지를 바닥에 놓고 엎드려 주어진 제목을 두고 시상을 모으며 쓰던 기억이 난다. 느지막한 시간에 발표가 있었고, 장원과 차상과 차하를 한 명씩 그리고 가작에 세 명을 뽑았었다. 아무튼 우리 문예반은 늘 좋은 성과를 냈었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상주는 동시의 마을”이라고 이무일 선생님은 우리에게 다시 한번 자랑스럽게 말씀하시곤 했다.
아! 그리고 정말 추석을 어찌 잊으랴. 높은 추석 밤하늘 위에 둥실 떠서 야트막하게 엎어져 있는 듯한 초가집과 기와집 사이 온 동네 골목골목을 환하게 비추던 상주의 그 크고 둥글고 환한 보름달! 내 기억으로는 처음으로 엄마가 추석빔으로 사 주신 감색 주름 치마와 빨간 스웨터를 받고 얼마나 흥분했는지 모른다. 오래 오래 입으라고 엄마가 장에서 사 오신 주름 치마는 너무나 길어 끈을 양쪽 치마 말기에 달아 가슴위로 끌어 올려 입고 다녔어야 했다. 대구에 다시 전학 와서 6학년 경주 수학 여행 사진에서야 그 치마를 비로소 허리에 제대로 입은 내 모습을 볼 수 있었지만, 그래도 마냥 행복하기만 한 때였다.
차가운 겨울 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어느 날 우리 집 앞에 있는 성당 마당에 트럭이 당도하면 그 트럭에서 내려놓은 큰 박스를 열고 수녀님들이 책들과 두꺼운 겨울옷들을 꺼내어 동네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아마도 미국에서 보내준 구호 물자였으리라. 그 중에는 이미 사용한 성탄 카드도 끼여 있었다. 반짝이는 은박지와 금박지 종이 위에 십자가가 높이 있는 하얀 교회를 중심으로 캐럴을 부르는 사람들과 스케이트를 타는 아이들이 그려진 카드였다. 카드를 보는 순간의 그 순박한 시골 사람들의 미국에 대한 황홀함과 선망의 눈빛들이 아직도 내 퇴색한 기억 속에 남겨 있다.
모든 것이 천천히 슬로 모션으로 부각되며 한가로운 내 기억 속의 상주, 나에게는 온통 아득한 그리움의 대명사가 된 상주가 이번에 이렇게 큰 일을 당한 것이다. 안타깝고 또 안타깝다. 신문에는 그 어린 학생의 빈 책상 위에 놓여진 꽃다발의 사진이 크게 실렸다. 혹시 내가 다녔던 그 학교 그 교실이런가?
한현숙/ 워싱턴 여류수필가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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