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이민을 환영하며 이민은 미국의 자부심이다. 그러나 우리는 새 이민자들이 가능한 한 빨리 미국의 시민이 되고 또 영어를 구사할 것을 원한다. 그렇지 못할 때 미국의 토박이와 새 이민자 사이에 긴장이 생긴다.” 이것은 ABC-TV의 시사프로 <나이트라인>에서 얼마 전 이민문제를 다뤘을 때 크리스 월러스 앵커가 미 주류의 이민관을 요약한 발언이다.
메인 스트림(주류) 미국인들의 의식 속에 자리잡고 있는 이 멜팅 팟(Melting Pot) 개념은 새 이민자들의 미국 문화에의 동화(同化), 즉 미국화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는 태산과 같은 오해, 갈등, 시행착오가 도사리고 있다. 그리고 미국에 한 발짝 먼저 정착한 이민들이 후속 대열을 백안시하는 선점의식도 장애물 가운데 하나이다.
미국의 대도시에 인접한 여느 작은 마을과 다를 바 없는 북부 뉴저지 주의 소도시 팰리세이즈 파크에서 한 때 격랑(激浪)을 일으켰던 주류사회와 한인이민들 간의 마찰은 멜팅팟 패러다임이 제기하고 있는 미묘한 문제에 우리의 관심이 요구되는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팰리세이즈 파크는 뉴욕의 심장부 맨하탄에서 허드슨 강을 건너 포트 리에 인접하고 있는 면적 10평방 마일에 인구가 고작 1만5천여 명에 불과한 작은 마을로서 아일랜드계와 독일계의 이민들이 1850년대부터 몰려와 정착하기 시작한 유럽계 백인들의 텃밭이었다. 이곳에 약 15년 전부터 한인들이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한인이민의 물결은 사소한 문화의 차이와 오해가 낳은 충돌이 없었다면 결코 ‘너희 나라로 꺼져!’ 라는 심각한 거부반응을 유발해야 할 침입이 아니었다. 그것은 미국 이민사의 여느 페이지에서나 만나는 이민이 남긴 전설(Saga)의 재연(再演)에 불과한 것이었다.
향토 사학자 프랭크 패티는 말한다. “이곳은 늘 뉴욕 시에서 넘친 이민의 물결이 와 닿았다. 20세기 초에는 이태리계, 그 전에는 아일랜드계와 독일계였다.”
팰리세이즈 파크의 발전사를 보면 이 마을이 로우어 맨하탄(Lower Manhattan) 거리의 연장임을 알 수 있다. 이민자들은 이민초기에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두, 세 잡을 뛰면서 피 땀흘려 일한다. 그리고 어느 정도 살만하면 자연히 좀더 나은 환경을 원한다. 맨하탄에서 이민생활을 시작한 한인들이 정착을 위해 내디딘 발걸음이 처음 머문 곳이 이스트 버겐 카운티, 특히 팰리세이즈 파크였다.
한인들보다 한 발짝 먼저 이곳에 밀려 온 과테말라 출신 노동자들이 어느 주민의 말처럼 “벽에다 용변을 하는 등의 무례 때문에 불쾌감을 준” 것과는 대조적으로 한인들의 경우, 미지(未知)의 인종에 대한 초기의 두려움과 경계심이 수용의 단계를 거쳐 차츰 인정(認定)과 존경으로 변했다. 유럽계 이민 올드 타이머들은 한인들에게서 미국에 정착하던 자신들의 옛 모습을 발견했다.
한인들은 뉴욕에 인접한 팰리세이즈 파크의 부동산이 비교적 헐값임을 알자 그로서리 가게, 식당, 정육점, 잡화점, 그리고 피자 가게와 카펫가게까지 닥치는 대로 구입했다. 현재는 타운의 2백개 사업체 가운데 한인 소유가 90%에 육박한다.
그러자 주민들이 좋아하던 피자가게가 없어지고 가족들이 함께 주말에 외식을 즐기던 이태리 식당은 한식집으로 간판을 갈았다. 전에는 한가할 때 브로드 애비뉴를 거닐며 이 가게 저 가게에 들러 눈요기도 하고 주인들과 가벼운 대화를 나누는 재미가 쏠쏠했는데, 이젠 어쩌다 요긴한 물건을 구하러 브로드에 가면 온통 한글 간판이라 토박이 주민들은 마치 제3세계를 방문한 여행객처럼 소외감을, 아니 더 나아가 당혹감을 느꼈다. 주민들의 불만이 쌓이면서 갈등도 비례해서 높아져 갔다. 거기에 한인들끼리는 상품에 붙어있는 정가보다 싸게 판다는 소문까지 나돌자 몇몇 한인 가게는 달걀 세례를 받았다.
미 전역의 많은 도시들의 경우처럼 15년 전 팔리세이즈 파크 다운타운은 죽어가고 있었다. 빈 가게들이 대부분이었다. 한인들은 지난 15년 동안 이 피폐한 브로드 애비뉴를 아메리칸 드림으로 가꿨다. 그래서 한인들은 팰리세이즈를 그들의 미국에 대한 공헌의 표상으로 인정받기를 원한다. 또 바로 여기에 한인들의 자부심이 있다.
그러나 미국의 메인스트림 주민들은 한인들의 ‘공헌’을 다른 차원에서 요구한다. 팰리세이즈의 샌디 파버 시장은 말한다. “코리언들은 시정 간담회나 시의회 모임에 나오지 않는다. 물론 투표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앰뷸런스 서비스, 소방서 등에 150명의 자원 봉사자들이 조력하고 있은 데 코리언 볼룬티어는 딱 한 사람뿐이다.”
바로 이 때문에 미국 러시가 시작된 지 30여 년에 불과한 짧은 기간에 눈부신 경제적 성공을 이뤘다고 찬사를 듣는 한인이민에게 걸맞지 않은 정치적 미아(迷兒)라는 딱지가 붙었다. 심지어 한인은 유태인이나 일본인보다 더 심한 경제적 동물이라는 혹평까지 나오고 있다.
지난 주 금요일 북버지니아 주, 훼어팩스의 타이슨스 코너에 위치한 맥클린 힐튼호텔에서 개최된 시민연맹(회장 변종수) 주최의 한인 정치참여 포럼에 참석한 주제발표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우리 동포들은 미국의 선거과정에 적극 참여하여 목소리를 내자고 역설했다. 이민사 1백년을 지나 2백년에 도전하고 있는 한인 이민들에게 정치력신장은 미국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아 갈 우리의 2세들의 운명을 좌우할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이 과제를 성취하는 길은 바로 우리가 이 나라의 당당한 주인이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미국 시민사회의 일원으로서의 의무를 다 하는 데 있다.
미국 지방자치제의 시민 민주주의는 ‘참여’가 곧 원동력이다. 민주주의 자체가 공동의 참여에서 서식한다. 차제에 팔리세이즈를 반면교사로 하여 우리 동포들 모두가 미국의 정치과정에 적극 참여하는 자세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원한다.
이선명/KPI통신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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