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용정 시 외곽을 해란강이 관류한다. 물이 줄고 강폭도 좁아 강이라 부르기에는 초라하나 강변을 차로 달리는 한국 여행객은 절로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가 된다.
일송정은 인근 연길 시에 닿기 앞서 정자 형태로 나타나는데, 강행군 출장의 여독 때문일까 아니면 차안에서 홀짝인 중국 소주에 취해서일까, 정자 계단에 드러누워 그대로 `거친 꿈`에 빠져들고만 싶다. 정자 옆 간이 찻집에 들려 일송정을 내다본다. 그리고 생각해 본다. 선구자란 무엇일까. 서울에 돌아와 춘원 이 광수의 ‘민족개조론’을 새삼 꺼내 읽음도 그래서다.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 잡지 개벽에 연재되면서부터 시비의 도마 위에 오른 이 글은 구절 한마디 한마디가 쓰리다.
민족이 뭔지를, 왜 민족에게 마지막 기대를 걸지 않을 수밖에 없는지를 춘원은 망국을 목도한 반도의 지성답게 슬프게 증언하고 있다.
이 글은 일본관헌의 사전 검열을 통해 독자들에게 전달됐다. 사전 검열은 받아본 사람만이 그 사정을 안다. 3공과 5공 시절 서울의 신문기자들은 계엄령만 터졌다 하면 물 묻은 신문대장을 들고 권총 찬 장교들 앞에 열 지어 순서를 기다렸다. 동료기자가 쓴 한단의 문장, 단 한 줄의 제목만이라도 제발 빨리 통과되기를 바라며 장교들에게 없는 말 있는 말 주워대고 눈치를 살피던 일이 엊그제 같다.
“…또 그네(영국)의 식민지를 다스리는 제도를 보건데 자기네 본국을 표준 하여 철두철미 영국의 속령이라는 표가 나기를 반드시 힘쓰지 않는 모양이요, 다만 실제로 자기의 식민지인 이익을 취하면 그만 이라 하는 듯 합니다. 마치 커다란 유니언잭(영국국기)을 그 땅에 달아 놓으면 그만이지 구태여 방방곡곡, 가가호호가 유니언잭을 달아야한다는 철저한 생각은 아니 가진 듯 합니다. (이 점에서) 아주 이상적으로 철저하고 조직적으로 모국화하려고 애쓴 불국(佛國,프랑스)보다 훨씬 유효하게 그 식민지를 모국화하는 공효(功效)를 얻습니다… “
이 글이 쓰여 진 1921년은 3.1운동이 터지고 2년 후가 되는 시점으로, 일본은 조선민족의 반발에 놀란 나머지 조금씩 유민(柔民)정책으로 방향을 틀던 시기인 만큼 춘원은 그 허점을 비집고 들어가 일본 당국으로 하여금 식민정책을 영국의 그것에 가깝게 방향을 틀도록 교화시키려 했던 것 같다.
민족개조라는 조선민족을 향한 확성기를 틀어 놓되, 실은 그 확성기 뒤편에 앉아있는 일본정부의 귀에도 뭔가 들어가도록 영국식 식민정책의 비교우위론을 폈던 것 같다.
이 글을 쓰기 직전 춘원은 상해에서 임시정부의 일을 거들며 도산 안 창호를 만나 그의 동지이자 제자가 된다. 민족개조론은 그러고 보면 춘원이 바깥세계에 머물며 경험하고 사유해 낸 민족론이다. 따라서 이 민족론에는 해외파인 도산의 뜻도 깊이 담겨있다고 봐야한다.
춘원 스스로도 민족개조론의 서문을 통해 “…나는 조선 내에서 이 사상을 처음 전하게 된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알며, 이 귀한 사상을 선각한 위대한 두뇌(도산)와 공명한 여러 선배에게 이 기회에 또 한번의 존경과 감사를 드립니다…”고 정직하게 토로하고 있다. 춘원에게는 이런 정직이 정말 돋보인다.
춘원은 프랑스 민족심리학자 르 봉 박사의 논문을 토대로, 민족에게는 불변요소와 가변요소가 있다고 보고, (당시)우리민족의 치부인 부정직, 게으름, 의타적인 생활 태도 등의 가변요소를 민족개조론의 골자로 삼았다.
여기서 춘원의 민족개조론을 새삼 들먹임은 그 개조론의 입김이 당시 미주 한인 동포사회와 상해에 사는 소위 해외파들에게서 비롯됐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중국 출장에서 돌아와 본즉 춘원은 이미 예상했던 대로, 또다시 친일파로 분류돼 있었다. 선구자란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한다.
만주 국경 강가에서 말 달리던 독립군이 아니면 선구자가 아닌가. 부정직, 게으름…등 수천 년 민족 타성의 산맥을 뛰어 넘던 춘원은 그 거친 꿈을 어디서 쉴 것인가.
춘원에 대한 단죄를 도산은 어이 생각할까. 또 그의 정신적 지주였던 미주 한인동포사회가 내리는 진단은? 일송정 정자에서 느낀 예의 현기증이 다시 도진다.
김승웅
한국재외동포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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