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놀드 슈워제네거 캘리포니아 주지사는 LA코리아타운을 한번도 방문한 적이 없다. 주청사를 비우고 너무 돌아다닌다는 지적까지 받은 그의 얼굴을 우리는 아직 대하지 못했다. 어쩌면 남가주에 수십만 인구를 가진 코리안아메리칸 커뮤니티가 있다는 것을 주지사는 모르는 지도 모른다. 아, 혹 왔더라도 2년전 주지사 당선 승리파티장에 입장을 거부당했던 한인기자들이 그에 관한 취재를 보이코트했을 수도 있겠다. 그래서 우리에겐 아직도 슈워제네거하면 ‘주지사’보다는 검은 가죽점퍼에 선글래스를 쓴 사이보그 킬러 터미네이터가 먼저 떠오른다.
아직 코리안 커뮤니티와 슈워제네거 주지사는 ‘남남’이다. 우리도 그에게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2003년 이민1세인 그가 주지사로 당선되었을 땐 우리도 기대가 컸다. 액센트 강한 그의 영어에 친밀감마저 느꼈었다. 그러나 우리의 짝사랑이었음을 깨닫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공화당의 피트 윌슨 주지사도, 민주당의 그레이 데이비스 주지사도 그렇치는 않았다. 주지사의 많은 행보가 한인들에게도 관심사였고 커뮤니티 주요행사에 참석한 그들과 악수하며 우리의 입장을 전하고 낯을 익혔었다.
한인사회만의 느낌은 아닌듯 하다. 지난주 캘리포니아주 공화당내에선 슈워제네거 주지사의 라티노 냉대를 비난하는 공개서한이 발표되었다. 주정부 요직에 라티노를 전혀 등용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각종 주선거에서 경쟁력있는 라티노후보에 대한 지지선언을 외면한 주지사와 당 지도층의 처사를 ‘도덕적으로 잘못이며 정치적으로 어리석다’고 맹렬히 비난했다.
‘이민의 땅’ 캘리포니아의 이민 출신 주지사가 이민 커뮤니티들에 냉담하고 무관심하다 ?
그가 지난주 재선 출마를 선언했다. 4년 더 ‘우리들의 주지사’가 되고 싶다는 것이다. 2006년 선거까지는 아직 14개월이나 남았지만 이례적으로 서둘러 출마를 선언한 것은 오는 11월8일의 특별선거 때문이다. 8개의 프로포지션이 투표에 부쳐지는데 그중 4개를 슈워제네거가 강력히 지지하고 있다. 교사들이 정교사가 될 때까지의 유예기간을 현행 2년에서 5년으로 늘이자는 프로포지션 74, 공무원노조가 정치헌금을 하려면 노조원들의 사전동의를 받아야한다는 프로포지션 75, 주예산 지출을 제한하여 예산집행에 대한 주지사의 권한을 강화시키는 프로포지션 76, 선거구 재조정권을 현행 주의회에서 은퇴판사들에게로 넘겨주는 프로포지션 77 등 4개안이다.
이번 특별선거는 불꽃 튀기는 정치전쟁이다. 노조와 비즈니스의 대결이고, 진보적 민주당과 보수적 공화당의 싸움이며 주의회와 주지사의 한판 힘겨루기다. 주지사에 대한 신임을 묻는 주민투표의 성격을 띄우고 있어 슈워제네거에겐 이겨야하는 선거다. 이기려면 돈이 필요하다. 도네이션을 해야 할 이익집단 쪽에서 보면 돈댔다가 프로포지션 부결되고 1년후 슈워제네거가 정계에서 사라지면 민주당의 보복만 남고 돈은 날리는 꼴이 되어버린다. 이들을 안심시켜 모금을 하기위해서라도 ‘나는 떠나지 않는다’는 확실한 출마선언이 필요했던 것이다.
피플파워의 정치태풍을 몰고 당당히 입성했던 그가 왜 이렇게 절박해 졌을까. 인기가 폭락했기 때문이다. 주의사당 앞에서 빗자루를 높이 치켜들고 정계의 부패를 깨끗이 쓸어버리겠다면서 캘리포니아를 열광시켰던 스타파워가 소진된 것이다. 당시 그는 공화당 후보였지만 중도파 민주당과 무소속에서도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참신한 아웃사이더’였고 예산집행에서는 온건한 보수이면서 낙태·총기·동성애등 사회이슈에선 중도 리버럴이었던 그의 성향이 캘리포니아 보통 주민들의 생각과 맥을 함께 했기 때문이다.
지난 2년 그는 많이 변했다. 변한 것처럼 보인다. 기성정계의 부패를 일소하겠다던 참신한 아웃사이더가 그들보다 많은 정치 헌금을 거두어 들였고 민주당주도 의회와 정면 대립하며 타협의 정치가 아닌 분열의 당쟁으로 주민들을 심란케 하면서 보수우파로 계속 기울고 있다.
그의 지지도는 36%로 떨어졌다. 지난해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57%가 재선을 반대하고 있다. 확실한 지지세는 공화 보수층뿐인데 캘리포니아는 민주당 표밭이다. 공화당은 등록 유권자의 3분의1에 불과하다. 지금 그의 책상위엔 주지사 서명을 기다리는 몇 개의 법안이 있다. 최저임금 인상안, 불체자 운전면허 발급안, 동성애자 결혼 합법화안 등이다. 이 3가지에 다 거부권을 행사해야만 보수층의 지지가 확보되는데 그러면 민주당과 무소속의 온건파 유권자들 마저 등을 돌리게 된다. 진퇴양난이다.
아직 슈워제네거의 정치부음을 쓰기는 이르다. 정치는 상대적 게임이다. 아무리 하락했다해도 그의 지지도는 주의회보다는 높고 개인적 인기와 정치적 호소력은 얼마든지 되살릴 수 있다. 카리스마로 보나 지명도로 보나 민주당엔 현재 그를 능가할 적수가 없다.
그러나 마이너리티, 특히 이민계의 지지를 되얻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2년전 그가 약속한 자동차 등록세 환불에 흔들려 한 표를 던지고 지금쯤 실망하는 사람도 나 하나만은 아닐 것이다. 앞으로 그의 자세가 크게 달라진다면 모를까 ‘4년이나 더’ 멀고 낯 선 극우 보수인사를 ‘우리들의 주지사’로 갖고 싶지는 않다.
박 록
주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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