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때 조선총독부가 ‘단군조선’ 기원(起原)의 실체를 밝혀줄 비밀 코드가 담겨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상고사(上古史) 대부분을 “한민족의 혼을 말살하기 위해” 태워버린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그 사료 중 일부가 일본의 황실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반가움에 앞서 착잡한 심정을 금할 길 없다.
해방 후 출간된 ‘군국일본조선강점36년사’에는 조선총독부가 초대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의 명령에 따라 1910년 11월부터 이듬해 12월말까지 1년 2개월 동안 우리 나라의 고사서(古史書) 51종 20여만 권을 약탈했으며 이 때 단군조선에 관한 서적 대부분을 소각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1933년부터 12년간 일본의 황실도서관인 궁내청 쇼로부(書陵部)에서 우리 나라의 상고사(上古史) 관련사서를 분류하는 일을 담당했던 박창화라는 분이 사망하기 직전 “쇼로부에는 단군조선과 관련된 책들이 쌓여 있었다”고 서울대 최기철 교수에게 고백한 사실이 최근 언론에 공개된 것이다.
한편 1866년의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해군이 강화도의 외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던 왕실 관련 귀중품 99점과 도서 1천7종 5천67책 가운데 3백59점을 약탈해 갔으며 나머지는 모두 소실되었음이 최근 밝혀졌다.
서울대 이태진 국사학 교수는 대한국제법학회가 얼마 전 주최한 ‘문화재의 국제적 보호’ 라는 주제의 학술대회에서 1857년에 작성된 외규장각의 도서목록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병인양요 당시 불타 없어진 문화재에는 의궤(儀軌) 1백25종 2백24책, 영조가 손수 쓴 시문 25종 등 왕실의 유일본 다수가 포함된 사실을 밝혀냈다고 발표했다.
10여년 전 한불 정상회담에서 프랑스 해군이 병인양요 때 약탈한 고서화를 반환하기로 합의한 바 있었으나 그 약속이 아직도 이행되지 않고 있다.
해방 이후 군정시절에 미 대사관 문정관을 비롯한 외교관들과 미군 장성들이 우리 나라의 희귀 문화재를 대량 반출한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제국주의 시대 약탈한 장물이 가장 많이 보관된 런던의 대영박물관 소장품 중 압권은 파피루스 상형문자를 해독하는 열쇠를 제공한 이집트의 로제타석(石)과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에서 절취(截取)해 온 조각품들이다. 몇 년 전부터 두 유품에 대해 해당 정부가 반환요청을 하고 있으나 영국은 이 유물들이 “인류공동의 문화유산”이라며 반환불가 주장을 고수하고 있다.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 때 약탈한 오벨리스크는 파리 콩코르드 광장에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로제타석 역시 나폴레옹의 보병이 나일강 유역의 전선에서 참호를 파다 발견한 인류 최고(最古)의 문화재이다.
고구려의 영토가 광활한 만주지역을 포함하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소중한 사료인 광개토대왕비를 변조하여 역사를 왜곡하려 했던 일본이 탈취해 간 우리의 상고사 자료 중 비록 일부나마 소각하지 않고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은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된다.
이런 보도를 접할 때마다 제국주의 발굽에 짓밟힌 우리 민족사의 스잔한 잔영을 보는 것 같아 비감이 피를 끓게 한다. 제국주의는 피압박 민족에게 살육, 폭압, 착취 이상의 폐해를 상흔(傷痕)으로 남기고 있다. 그것은 바로 문화 말살, 전통과 가치체계 파괴, 거기에 역사의 왜곡으로까지 이어져 인류문명의 동공화(洞空化)를 초래한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으로 6천년의 역사가 비장되어 있는 메소포타미아의 유적이 파괴된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최근 보도에 의하면 북한의 국보급 문화재가 개성의 옛 무덤에서, 의주의 사찰에서, 또 평양의 박물관에서 자취를 감추고 있다고 한다. 꼭꼭 잠겼던 북한의 빗장이 열리면서 문화재의 해외유출이 시작된 것이다.
뉴욕 크리스티에서 이달 20일에서 22일까지 한국, 중국, 일본 및 동남아시아의 미술품을 경매한다는 보도가 있었다. 이번 경매에 나온 한국 미술품으로는 조선시대 화가 정선(1676-1759)의 16폭짜리 소상팔경도와 이조 백자 채연대가 단연 돋보인다. 소상팔경도의 낙찰 예상가는 25만-35만 달러에 이른다고 한다.
이들 우리의 문화재가 어떤 경로를 거쳐 미국에서 경매에 붙게 되었는 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소더비나 크리스티 등 미술품 경매에 나오는 한국 고서화나 도자기류 등은 대부분 오만한 제국주의의 ‘전리품’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차제에 해내외의 동포들이 연대해서 일본, 프랑스, 미국을 비롯하여 중국, 독일, 러시아 등 열강에 빼앗긴 우리의 문화재를 되찾는 운동을 전개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문화재는 과거의 거울일뿐 아니라 민족의 전통, 가치체계 및 공통의 예술적 인식을 오늘까지 시각적이면서 동시에 감각적으로 전달해 줌으로서 동일 문화권에 살아온 우리의 가슴을 하나로 묶는 접착제 역활을 한다. 따라서 빼앗긴 문화재를 되찾는 운동은 우리의 가치체계를 복원한다는 점에서 뜻있는 일이다.
문화재의 복원은 바로 문화의 실지회복(失地回復)이 아닐가 생각해 본다.
이선명/KPI통신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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