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가 애도했던 다이아나 공주의 참사가 벌써 8돌을 맞는다. 세인의 흠모를 한 몸에 흠뻑 받던 그녀의 명망이 파리의 화려한 외출에서 만난 비운으로 산화한 게 바로 엊그제 같다.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쏜 질투의 화살을 맞은 것일까? 왜 하필 다이아나인가? 그녀는 자신의 진솔한 삶을 찾아 대영제국 황실의 새장을 뛰쳐나온 현대판 노라였다. 트로이 성에서 사랑의 포로가 되었던 아카이아 족의 왕비 ‘헬렌’이 이오니아 섬으로 귀향하기 위해 이제 막 첫 발을 내딛고 있었다.
올림포스 산정에서 하산하여 소담한 인간의 삶을 찾아 나섰던 그녀의 갑작스런 타계는 전 세계에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에 버금가는 충격을 던져 주었다. 그녀를 조문하기 위해 줄을 선 런던 켄싱턴 가의 긴 행렬은 끝이 없었고, 전지구적 애도의 물결은 대서양에서 태평양까지 도도히 넘실거렸다.
다이아나 공주는 오랫동안 나병, 에이즈 환자, 장애자 등 사회의 소외계층, 그 가운데서도 특히 불우한 천민들의 고통을 해소하기 위한 자선활동과 환경보호 운동에 앞장섰고, 지뢰사용 금지를 비롯하여 세계평화를 위한 국제적 캠페인에 앞장 서 많은 찬사를 받았다. 바로 이 때문에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는 대열은 인종과 피부색, 그리고 종교를 초월한 각양 각색의 범인들이 다수를 이뤘다. 다이아나는 이제 서양 문화에서 수천 년 차지해 온 고대 그리스 전설의 헬렌을 밀치고 전 인류가 흠모하는 구원의 여신으로 남게될 개연성을 전면 부인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문제는 그녀의 죽음이 단순히 파리의 외출에서 만난 불의의 사고라는 한정적 상황의 틀에 머무를 수 없다는 데 있다. 그녀를 끝내 비극으로 내몬 주변상황은 현대문명의 특징인 매스미디어의 선정주의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다이아나 공주의 참사는 명망의 광란으로 상징되는 현대적 우상숭배에 그 원인이 있었다. 그리고 ‘조형적 가치’로 대변되는 허상을 쫓는 군중들의 간접효과에 의한 카타르시스 욕구가 그 공범이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다이아나는 19세의 꽃다운 나이에 영국 황실에 간택되어 현대의 군주제도의 미화를 위한 퍼블리시티 곡예의 소용돌이에서 세인의 이목을 끌었고, 결국 그 돌풍에 휘말려 불귀의 객이 되었다. 그녀는 신탁이라는 중세기 암흑시대에 태생된 반문명적 정치제도의 유물이 현대에 안주하고 있는 영국 입헌군주제의 가장 비극적 희생양이 되었다. 영국 황실은 계급과 종교와 형식에 의해 순화된 영국인의 소시민주의가 쌓은 아서 왕 카멜롯의 유적일 따름이다. 다이아나의 짧은 생애는 한동안 이 앙증스런 잔해의 미화작업에 이용됐고, 그녀의 말년은 그 가면을 벗기는, 그러나 역부족한 고전으로 버둥거렸다. 그녀의 비운은 바로 이 후기작업에 대한 반작용이 원인이었는지 모른다.
세계의 영상매체 관객은 절세의 광영으로 치장한 왕자의 출현과 그의 초대로 카멜롯 성에 입성하는 평민의 신분상승에서 카타르시스를, 그녀의 환상적 미모에서 나르시스를 찾았다. 그녀의 혼외정사, 파경, 그리고 뒤이은 ‘자유’에서 현대라는 무대에서 연출되는 대 스펙터클을 관람하는 객석의 희열이 지구를 뜨겁게 닳아 오르게 했다. 현대인들이 군중 속의 고독에서 우상을 찾은 것이다.
44년 전 미국의 저명한 비평가 다니엘 부어스틴은 그의 저서 <이미지(Image)>에서 저널리즘과 각종 보도매체의 영상적 혁명은 장기적인 각고의 노력으로 성취한 업적에 대한 인정을 받아 비로소 누려야 할, 그 때문에 사람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명망이 순간의 시각적 허상에 자리를 내주고 있다고 개탄했다.
1905년 에디트 화어톤는 <머어스 가(House of Mirth)>에서 “요즈음에 와서 가시적인 것만이 비범하고 우월한 것으로 간주되고, 진실은 명망의 그늘에 가려지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바로 오늘 팽배하고 있는 언론의 황색현상을 예견한 경고였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최근 일부 언론이 한동안 진실 추적, 사회정의의 구현이라는 본연의 사명을 외면해왔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그렇다. 언론은 이제 21세기의 신기원을 맞아 수천 년 내연해온 인류의 이상을 현실로 향도해야 한다는 절대적 소명 앞에서 옷깃을 여미고 자성하고, 다이아나처럼 ‘광영’의 새장에서 뛰쳐나와 민족사에 새 역사의 새벽을 타종하는 데 앞장서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오늘 조국에서는 모든 분야에서 세대교체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그런데 왜 하필 언론계에서만 과거에 안주하여 구시대의 잣대를 가지고 오늘의 방정식을 풀어보려고 버둥대는 올드타이머들이 많은 지 이해할 수 없다. 이제 더 이상 어제가 오늘을 지배할 수 없다. 나는 새 시대를 열기 위해 고투하고 있는 정의로운 언론인들에게서 저 캄캄한 밤하늘의 별들 사이를 유영하는 그들의 기상을 읽는다. 바로 거기에 우리 민족의 희망이 있다. 언론은 횃불이다.
이선명/KPI통신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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