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시간으로 꼭두새벽 서울 본사의 편집국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서독의 작곡가 윤이상(尹伊桑)을 베를린으로 찾아가 인터뷰하라는 취재 명령이었다. 지금부터 20년 전의 일로, 윤이상은 금기의 인물이었다. 당시 전두환 군사정권한테는 물론이고, 기자들한테도 두렵고 골치 아픈 존재였다.
그는 막말로 ‘빨갱이’로 통했고, 그의 얘기를 괜히 썼다가 기관원한테 직사하게 얻어터지려는 무모한 기자는 당시의 한국 언론 풍토에서는 찾기 어려웠을 때다. 왜 이토록 쓴 잔이 내게 떨어진단 말인가.
취재지시의 배경인즉 5공 실세인 3허(許) 가운데 하나가 윤이상을 만나 그를 북한으로부터 한국 쪽으로 회유키로 작심한 만큼, 언론이 이런 추세를 감 잡아 그와 인터뷰를 시도할 경우 잘하면 그 기사가 빛을 볼 수도 있으리라는 계산에서 나온 것이었다.
영국령 서 베를린, 1985년, 봄.
거실에서 윤이상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몹시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2층 서재 겸 작곡 실에서 아래층 거실까지 내려오는 것도 벅찰 만큼 심장이 무척 약해있었다. 68세 노인치고는 눈빛이 형형 했고, 대신 뭔가 경계하는 빛도 역력했다. 어색한 분위기도 피할 겸 곧바로 질문으로 들어갔다.
- 작가의 경우 전업 작가와 풍류작가가 있습니다. 선생님은 어느 편에 속하십니까.
“제 경우 전업 작가 쪽입니다. 사마천의 말이던가요? 말을 타고서도 시상에 빠지고(馬想), 누워 잘 때도 시상이요(寢想), 변소에 가서도 시를 생각한다는 말이 있는데, 아주 흡족한 표현이라 여깁니다. 이 중 하나를 택하라면 제 경우 침상이 가장 유효합니다. 누워있을 때 가장 좋은 악상이 떠오르니까요”
그는 당시 독일 국민들한테 자기네 대통령보다 더 유명한 인물로 통했다. 그 위명(威名)이 금갈까 두려워 나는 애써 조심스레 질문했고, 그의 답변 역시 너무도 대가 다워, 오만이나 겸손 따위의 수준을 훌쩍 넘어서 있었다. 묻는 자의 진의를 더 먼저 파악해서, 답변을 듣다 보면 “맞았어! 바로 저걸 물었던 거야” 하고 나 스스로가 놀랄 정도였다.
그는 작품을 살아있는 유기체로 봤다. 사람에게 얼굴과 인격이라는 두 가지 요소가 있듯, 작품에도 그 자체의 미학(얼굴)과 정신적 문제점(인격)이 있다는 것. 그 정신적 문제점이 구체적으로 뭐냐는 나의 질문에 그는 한순간 고민하는 흔적을 보이더니 “창작하는 사람의 종교관이나 정치관을 모두 포함하는 문제점을 말합니다”고 어렵게 대답했다. 예술가의 정치관이라! 그는 도에 넘게 민족을 강조했다.
“민족은 내게는 미학적 일만큼 절대 절명의 요소입니다. 나의 예술, 나의 도덕 못지 않은, 때로는 그 이상의 중요성을 지닌 것이 민족이며, 제 경우 무덤에 갈 때도 이 민족이라는 짐을 기꺼이 지고 갈 준비가 돼 있습니다”
파리 집으로 돌아와 나는 밤을 꼬박 새워 기사를 썼다. 신문 두 페이지 분량의 기사를 써 서울로 송고했다. 기사는 그러나 신문에 실리지 않았다. 하루가 가고 열흘이 갔다. 한달이 흐르고 석 달이 지났다. 나는 점점 불안해 졌다. 이런 거짓 생을 살면서까지 기자생활을 해야 하는가….
이리 될 바에야 당초 인터뷰를 신청할 때 그에게 “기필코 기사화 될 테니 염려 말라!”던 장담을 하지 말았어야 옳았다. 불안과 고민은 눈덩이처럼 커지고, 마침내 그 무게를 견디다 못해 베를린 그의 집에 다시 전화를 건 것은 반년이 넘어서였다. 그는 내 이름까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용히 나를 위로하기 시작했다.
“김 특파원, 가슴아파하지 마시오. 나는 당신의 장담을 믿었던 것이 아니라 당신의 눈빛을 믿었던 것이오. 한국의 실정에 비추어 내 얘기가 나갈 상황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당신이 전화를 걸어준 것만으로 만족합니다. 정말, 잊어버리세요!”
그러나 나는 잊은 적이 없다. 잊을 수가 없었다. 이럴 바에야 기사를 서울 본사에 보내기 직전 미리 좀 볼 수 없겠느냐 던 그의 마지막 부탁이라도 들어줄 걸…. 이토록 뜨겁게 안타까운 재외동포 작곡가를 나는 언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까. 금년은 그가 유명을 달리한 지 정확히 10년이 되는 해다.
김승웅
한국재외동포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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