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은 교단에 올라서더니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오늘은 나의 마지막 수업입니다. 베를린으로부터 명령이 떨어져 내일부터는 독일어로만 가르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작가 알퐁스 도데의 단편소설 ‘마지막 수업’에 등장하는 구절로, 우리나라 40대 이상 독자라면 중고교 시절 국어교과서에서 누구나 한번쯤 읽었을 법한 대목이다. 소설은 이렇게 끝난다.
“…수업이 끝날 무렵 (교실 창밖으로) 프러시아군의 행군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선생님은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무척 아쉬운 듯 ‘여러분, 여러분, 나는 …나는 …’하고 더듬기만 했다. 한참을 그러더니 칠판 쪽으로 돌아서 이렇게 썼다. 프랑스 만세!”
이 나이에 읽어도 거듭 뭉클한 감동이 온다. 왜일까. 모국어에 깃든 생명 때문이다. 모국어와 외국어의 다른 점이기도 하다. 외국어에는 생명이 없다. 소설에서 느끼는 감동은 바로 이 생명이 내지르는 함성이다.
NAKS에 다녀와 이 글을 쓴다. NAKS란 재미 한인학교협의회(National Association for Korean Schools)의 이니셜로, 매년 7월 미 전역에서 순차적으로 열리는 재미한글학교 교사들의 연례 총회다. 지난 달 21일부터 사흘 동안 텍사스 주 휴스턴에서 열린 이번 대회에는 당초 400명의 예상을 훌쩍 넘는 600여 명의 재미 한글학교 선생님들이 모였다.
개막식장에서 선생님들을 뵈는 순간 나는 다시 뭉클해졌다. 모두가 작년 대회와 마찬가지로 자원봉사자들로, 대개 이민 오기 전 한국의 교사들이었다. 우리는 지금 한국인이나 미국인이나 먹고사는 문제에 관한 한 별 차이가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 웬만한 서울사람 가정의 냉장고를 열어봐도 맥주 한 두병씩은 다 들어있고, 오히려 미국인보다 더 잘 사는 한국가정도 수두룩하다. 잘사는 나라 서열로 따져 우리는 당당 11위에 올라 있다.
다만, 우리가 미국을 못 따라 잡는 것 하나가 있다면 그건 이웃에 대한 사랑과 배려, 구체적으로는 자원봉사일 것이다. 자원봉사란 원래 감사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한테 기대할 수 없는 산물이다. 심리학 교과서에 따르면 감사는 인간이 지닐 수 있는 최상의 정서 상태로, 한마디로 삶 속 깊은 곳에 내재하는 완벽성에서 온다.
이 미국적 완벽성을, 또 자칫 평생 따라잡지 못할 그 한계를 보라는 듯 깨주신 분들이 선생님들임을 나는 현장에서 느꼈다. 내 자식에게마저 가르치기 귀찮고 버거운 한글을 남의 자식까지 모아 가르쳐 온 600 여 명이 그 날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그 형형한 눈빛들을 상상해 보라.
그 효과를 살피면 더 놀랍다. 8년 전 SAT 2에 한국어가 채택된 것은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에 버금가는 쾌거로 불린다. 지난 연말 재미 한인 자녀 4,000 여 명이 치른 SAT 2의 성적은 800점 만점에 평균 749점이었다. 엄청난 수확이다. 이 수확의 견인차 노릇을 바로 재미한글학교 선생님들이 해낸 것이다. 뭉클한 감동의 배경에는 이처럼 늘 모국어가 개재돼 있다.
나폴레옹도 그 감동을 진작 인정한 듯싶다. 그가 남긴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는 명언의 원문은 ‘Impossibilite? Ce n′est pas francais!’다. ‘불가능? 그건 프랑스어가 아니야!’ 라는 뜻으로, 프랑스 말에는 그런 나약한 말이 없다는 는 걸 감동적으로 과시하고 있다.
짧지 않은 외국생활을 통해 나는 재외동포들의 삶이 무엇이며 어떤지를 깜냥에 파악은 했을 뿐, 정작 느끼지는 못했다. 그러다 작년에 이어 올해 두 번째 대회 참관을 통해 드디어 피부로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아, 이런 분들이 진작부터 계셨구나. 내가 바뀐 것이다.
나는 준비해간 축사 원고를 제쳐두고, 이 변화를 얘기했다. 선생님들의 눈빛이 바로 나를 변화시켰노라고 실토했다. 8년 남짓 꺾은 붓을 꺼내 동포 칼럼을 연재하는 것도, 또 불원천리 서울서 달려와 이 변화를 간증하는 것도 모두 선생님들의 눈빛 때문임을 강조했다. 끝으로, 고 마리아 테레사 수녀의 말이 바로 선생님들의 노고를 지칭한 것 같다고 위로했다.
“나는 큰일을 할 수 없습니다. 작은 일을, 오직 (하나님의) 큰사랑을 간직하고 해 낼뿐입니다”
김승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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