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부시대통령이 서둘러 새 연방대법관을 지명한 이유중 하나는 ‘리크게이트(Leakgate)’로 부터 여론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서 일 것이다. 리크게이트는 글자 그대로 누설 스캔들이다. 부시행정부내 ‘익명의 제보자’가 CIA 비밀요원의 신분을 언론에 흘린 사건이다.
2년여 동안 끌어오던 이 사건이 다시 뉴스의 각광을 받게된 것은 지난6일 뉴욕타임스의 주디스 밀러기자가 취재원 공개를 거부하고 구속되면서 부터였다. 같은 취재원에게 정보를 얻은 타임지의 매튜 쿠퍼기자는 취재원을 공개하겠다고 법 앞에 항복했다. 이슈는 당연히 ‘언론의 자유’여야 했다. 그러나 2주를 넘어서며 이슈가 완전히 바뀌었다. 부시행정부의 신뢰도를 묻는 정치스캔들로 비화한 것이다. 주인공은 백악관 비서실 차장 칼 로브 : 부시대통령의 30년지기로 텍사스 주지사 당선부터 이번 재선에 이르기까지 브레인중의 브레인인 백악관 최고 실세. ‘익명의 취재원’이다.
2002년 10월 미 연방의회가 대이라크 전쟁 허용 결의안 통과시켰을 때 많은 의원들은 전쟁의 정당성을 이라크의 핵위협이라고 밝히면서 영국이 입수한 정보이니 믿을만하다고 덧붙였다. 2003년 1월 부시대통령도 국정연설에서 ‘영국정부에 의하면 후세인이 아프리카로부터 상당량의 우라늄을 구입하려한다’며 이라크 공격의 명분을 강조했다. 그러나 CIA가 그 정보의 진위를 의심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두 달 뒤 미 국민의 절대적 성원을 받으며 이라크전쟁이 시작됐다.
전쟁시작 1년 전인 2002년 3월9일 CIA는 백악관으로 중대 사안이 담긴 메모를 송부했었다. 전 아라크 대사 조셉 윌슨을 아프리카에 파견하여 조사한 결과 영국 보고서는 사실과 다르다, 후세인이 테러용 대량살상무기 제조를 위해 우라늄 구입을 시도했다는 정보는 허위라는 보고였다. 연방의원들은 이 보고서의 내용을 몰랐는지, 이미 전쟁을 결심한 대통령은 알고도 무시했는지는 지금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자신의 조사결과를 무시당한 윌슨은 조용히 있지 않았다. 개전 몇 달 후인 7월6일 뉴욕타임스 기고를 통해 ‘미정부가 이라크의 핵위협을 과장하고 정보를 왜곡했다’며 이라크전의 명분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다음날 백악관은 핵위협이 ‘사실이라고 믿기는 하지만’ 국정연설에는 넣지 말았어야 할 내용이었다고 마지못해 시인했다.
그러나 구차스런 사과를 해야했던 백악관은 쉽게 분을 풀지 못했다. 손봐주기에 나선 것이다. 최고의 실세인 칼 로브가 직접 나서서 보수파 칼럼니스트 로버트 노박, 타임지의 쿠퍼기자등과 익명을 전제로 통화하며 윌슨의 아프리카행은 CIA요원인 윌슨의 부인이 주선했을 것이라는 내용을 흘렸다.
‘익명의 취재원’의 의도대로 이때부터 사건의 핵심은 이라크전쟁의 명분에서 멀어져 갔다. 미 언론들은 정말 윌슨이 변변치 못하게 CIA 요원인 부인 발레리 플레임의 주선에 의해 아프리카에 간것인가, 익명의 취재원은 누구인가에 보도의 초점을 맞추었다.
상황은 로브가 원하는 대로만 전개되지는 않았다. 사건의 파장이 커지면서 법무부가 수사에 착수했다. 특별검사가 임명되었고 정보요원 신원보호법을 위반한 누설자를 밝혀내기 위해 대통령까지 조사를 받았다. 이 재판과정에서 기자들이 증인으로 소환되었고 쿠퍼기자의 취재노트를 통해 ‘익명의 취재원’의 정체 칼 로브 자신이 만천하에 드러나 버린 것이다.
리크게이트는 앞으로 여러 각도로 조명될 것이다. 밀러가 수감되어 있는 한 언론자유 이슈도 계속 부각될 것이고 특별 수사가 진행되면서 정보요원 신원 보호는 어느 선까지냐는 법적 해석도 잇달을 것이다. 또 로브의 낙마 여부를 둘러싸고 가뜩이나 극과 극으로 치닫고 있는 민주, 공화의 이념대결도 시끄러울 것이다.
얼마쯤은 구경꾼의 입장인 우리의 관심은 보다 본질적인데 있다. 전쟁 부분이다. 이라크전쟁의 대의명분은 ‘우라늄을 구입해 핵무기를 제조할’ 후세인의 무장해제였다. 이라크전쟁은 이미 수많은 인명을 앗아가고 한 나라를 폐허로 만들었지만 테러에 사용될 것으로 우려한 ‘대량살상무기’는 발견되지 않았다. 리크게이트를 발단부터 하나씩 짚어보면 잠시 섬뜩해진다. 힘있는 자가 마음만 먹으면 정당한 명분쯤은 얼마든지 조작해 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되어서다.
이성보다 힘으로 밀고가는 워싱턴 강경보수의 일면을 다시 목격하면서 다음 주에 열릴 6자회담을 생각한다. 이라크는 있지도 않은 대량살상무기를 구실삼아 쳐들어갔는데, 핵개발을 이만큼이나 했다고 자랑하듯 협박하며 배짱 내미는 ‘악의 축’이 북한이다. 이번 회담도 실패하면 미국이 강경선회할 것이라는 대북응징 예상론도 없지 않다.
워싱턴이 리크게이트를 통해, 아니, 이라크 전쟁을 통해 뼈아픈 교훈을 얻고 그래서 조금 겸손해졌다면 보다 유연한 자세로 회담을 성공적으로 이끌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박 록
주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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