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선작
꼼장어는 오그라들었다
비 온 날 배달된 석간 신문 마냥
젖어 돌아온 남편 풀어진 두 눈은
좀체 드러내지 않던 축축함이 있었다
연기가 빼꼭한 포장 마차에 앉자
그는 말간 소주잔을 거푸 비웠다
푸른 귓바퀴에 뽀송한 살결
아들만한 나이 그 찌푸린 미간 앞에 서면
저절로 구부려지는 낙후된 뼈들이
몇번씩 인가 아리는 목젖을
눌렀다고 했다
자기 하나 바라보는 이들을 위해 짤린 그 자리에
꼭 있어야했다고 혀를 차며 되뇌었다
석쇠 불 위에서 꼼장어는 타면서도
돌아눕지 못하고 오그라들었다
식구들을 발찌처럼 찬 남자
비칠 걸음으로 걷는 발이 어두웠다
정갈히 가르마 타 빗던 검은 머리
탱탱하던 뒷덜미 말갛고 두툼하던 손 대신
풀 죽은 목고개 쓰다듬는 검버섯 핀 살 마른 손이
내 눈을 파고 들어
뒷 가슴을 훑는다.
한미주
타코마 양명교회 목사 사모
당선소감
길을 가다보면 깨어져 움푹 패인 길을 만날 때가 있었다. 때론 헛발을 딛어 균형 잃은 속은 신열을 토하기도 했지만 언제부터인지 메우고 싶지 않은 것을 알게 됐다 그 자그마한 웅덩이에 빗물이라도 고일 때면 바라만 보던 하늘에 손을 담글 수도 구름을 움켜잡을 수도 나에게 돌팔매질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살아가면서 만들어지는 웅덩이 속에서 베어 나오는 소리를 한올 한올 고치를 풀어 명주를 지어내듯 글로 쓰고 싶다.
제일 먼저, 날 만드신 하나님께 찬양 드린다. 또 부족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끝없는 격려로 마음 써주신 김정기 선생님께, 버팀목이 되어준 문우 조 권사와 남편에게 그리고 두 아이들에게 기쁨을 돌린다.
가 작
라싸 가는 길
낡은 꽃무늬 스카프에 철지난 코트를 입고
여인이 사막에서 길을 내린다
시방(十方) 어디를 둘러보아도
사람 살만한 곳은 보이질 않는데
헤진 가방 두 개를 들고 익숙하게 땅을 딛는다
달아나 버린 버스의 공간은 반짝이는 햇살로 차고
흰 구름과 마른 대지 사이에서
시간은 여인과 함께 멈추어 섰다
만 년도 넘음직한 돌들과
수수생생 엎드려 살아온 풀 위로
더운 바람들은 서성거리고
땅끝 위 날카로운 회색산들은
갈 수 없는 천국처럼 버티고 섰다
라싸 가는 길은 구름처럼 가는 길
바람처럼 춤추며 가는 길
키작은 보라꽃 울렁거리는 아지랑이 속으로
버적거리는 한 걸음 내딛을 때
소리가 흐르고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다
살아있다는 것은 기적같은 일
갈 곳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
정지현
▲정지현은 28년째 캘리포니아주에서 살고 있다. 현재 나파밸리에서부터 1시간 정도 떨어져 있는 버클리에 살고 있으며 캘리포니아 와인 아카데미(California Wine Academy)의 원장을 맡고 있다. 여행과 글쓰기와 바람을 좋아하며 낚시와 사냥을 싫어한다. 인간 문명의 확장에 대해 염려하며 사람들이 자연과 함께 조화롭게 사는 것을 열망한다.
항 아 리
창밖에 장마비 내리고
빈집에 놓인 항아리
텅 비인 것을 지극히 감싸안은 모습
빈집을 둘러싸고
두둘기며 소리지르며 웅얼거리며
내리는 소리를 가두는 고요함
펄럭이는 불길에 사로 잡혀
불가마 속에서
빚어진 열린 마음
단단하고 아주 조금 빛이 나는
두터운 손으로 어루만져논
너의 항아리
김종란
약 력
▲서울여대 국문과 졸업
▲2003년 뉴욕 청과상조회 추석맞이 백일장 장원
입상소감
詩속에 초대한 아픔과 상처에 절대자는 향유를 부어주신다 소리 지를 수 없는 공포의 가면을 벗겨주신다. 가난하고 작은 자를 사랑하여 주시는 그 분의 은은한 향기가 이 가로막은 거대한 벽에 詩의 창문을 달아주심을 믿는다. 사랑하는 것을 가르쳐준 가족과 오랜 친구들, 목사님과 교회식구들 뜨거운 용광로와 같은 문학교실, 김정기 선생님과 문우들에게 이 기쁨을 드린다 卒詩를 뽑아주신 심사위원들께 더불어 감사를 드린다.
시 부문 심사평
당선작인 ‘꼼장어는 오그라들었다’는 일선생활의 고단한 풍경을 잘 형상화했다. 젊은 날의 남편을 대비·회상하면서 고개를 넘은 나이의 남편이 직장마저 잃은 것을 ‘돌아눕지 못하고/오그라드는 꼼장어’로 연상하는 아내의 시선이 숙연해 보인다. 사실이든 아니든 설명 형식으로 진부해질 수 있는 사연을 품격을 갖추고 받쳐준 기량이 돋보인다.
가작 ‘라싸 가는 길’의 시인은 많은 습작을 거친 분으로 보인다. 내용의 분위기도 좋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곳곳에서 보이는 상투적인 표현이 오히려 이 시의 짐이 되고 있다. 끝마무리의 끈기도 필요하다. 이 시에서 마지막 연은 훌륭한 공간에 먹칠을 한 격이 되었다.
가작 ‘항아리’는 함께 보내온 11편의 시와 함께 고른 수준을 보이고 있어 일단 안심이 된다. 그러나 가벼운 스케치 풍의 터치가 많고 풍경이나 미술작품의 알레고리에 머물러 무엇인가 치열함이 보이지 않는 것이 흠으로 느껴졌다.
장려상 ‘도라지를 캐며’도 좋은 시인이 될 자질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모쪼록의 좋은 소재와 착상을 일일이 설명하느라 긴장감이 떨어진다. 남들의 좋은 시를 많이 접촉했으면 한다. 우선 이 시의 첫줄이 꼭 필요했을까. 다른 장려상‘나의 아름다운 품바’역시 쉽게, 그러나 깊은 의미로 읽히는 시다.
‘시린 맨발로 퍼런 세상을 차곡차곡 밟아’같은 절창도 좋다. 단지 많이 보여주는 것이 시에서는 자주 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말해두고 싶다. 한 곳에 집중하면 때때로 놀랄 만한 큰 힘이 되기도 한다.
마종기
시 인
다분히 회화적인 정지현님의 ‘라싸 가는 길’은 사람 살만한 곳은 보이지 않는 곳에 ‘헤진 가방 두 개’를 들고 버스에서 내렸다는 말만으로도 생이란 얼마나 막막하고도 고단한 사막인가를 충분히 보여준다. 하지만 과감하게 생략하면 더 좋았을 마지막 2행으로 인해 끝내는 한미주님에게 당선자리를 내주었다.
‘비온 날 배달된 석간 신문’이기도 하고, 타면서도 돌아눕지 못하는‘석쇠 불 위의 꼼장어’이기도 한 가장. ‘꼼장어는 오그라들었다’는 매우 적절한 시어를 선택, 고달픈 가장의 이미지를 훌륭하게 그려낸 수작이다. 함께 보냈던 ‘고등어’도 좋게 읽었다.
정지현님 외에 가작으로 정해진 김종란님의 ‘항아리’는 지극히 말을 절제함으로 오히려 다양한 해석을 가능케 하는 작품이다. 빈집 자체가 항아리거나 화자자신이거나, 더 나아가 ‘두터운 손으로 어루만져논’ 항아리는 또 다른 이미지로 변신을 하기도 한다. 함께 투고한 작품으로 보아 노력을 많이 하는 분 같아 앞으로 기대된다.
장려상 문선희님의 ‘아름다운 품바’는 언뜻 타령조로 술술 풀어낸 듯이 보이지만 결코 쉽게 얻을 수 없는 시적 진술이 들어있다. 눈물과 웃음으로 보여주는 아버지의 삶과 오버랩되는 자식의 삶. 여기에 품바라는 제목을 붙인 것 또한 높은 점수를 주기에 충분하다. 황민경님의 ‘도라지를 캐며’는 할말을 차분하게 풀어나가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아이의 말간 잇몸에/막 비치는 이처럼’‘가슴보다 더 깊은 곳에/이렇게 무서운 추(錘)를’내리고 있다는 등의 표현이 특히 돋보인다. 이밖에 박마리아님이 거론되었지만 아쉽게도 다음 기회로 미루면서, 응모자 전원에게 힘찬 박수를 보낸다.
한혜영
시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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