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숭아 심은 뜻은…
초저녁 별빛은 초롱해도 / 이 밤이 다하면 질 터인데 / 그리운 내 님은 어딜 가고 / 저 별이 지기를 기다리나 / 손톱 끝에 봉숭아 빨개도 / 몇 밤만 지나면 질 터인데 / 손가락마다 무명실 매어주던 / 곱디고운 내 님은 어딜 갔나 / 별 사이로 맑은 달 구름 걷혀 나타나듯 / 고운 내 님 웃는 얼굴, 어둠 뚫고 나타났소. / 초롱한 저 별빛이 지기 전에 / 구름 속, 달님도 나오시고 / 손톱 끝에 봉숭아 지기 전에 / 그리운 내 님도 돌아오소.
- 정태춘, 박은옥 고운 노래 봉숭아 전문
잊혀져 가는 정겹고 가슴 설레는 여름나기 민속체험
화단의 봉숭아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어린 시절 여름날 저녁, 봉숭아꽃을 따다 백반을 섞어 손톱 끝에 올려놓고 잠이 들면 다음날 아침, 손끝은 마법처럼 붉은 색으로 변해 있었다. 반짝거리는 매니큐어 없이도 우리 어머니와 누이들의 손은 봉숭아 꽃 붉은 빛으로 인해 곱디 고왔다.
민족 문화 되살리기 운동에 앞장서고 있는 성기순(58·민화협회 회장)씨. 지난 4월, 봉숭아꽃을 사다 화단에 심은 이유는 딸, 친구들에게 우리 민족의 자연 친화적 민속 전통을 체험해보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동안 그녀가 봉숭아 화단에 쏟은 정성은 특별했다. 매일 하루에도 몇 번씩 화단을 오가며 물뿌리개로 물을 주는 것은 물론, 돋보기로 여기저기 풀잎을 들춰내며 무당벌레와 개미를 잡아주기도 했으니까.
2달여 세월이 지나는 동안 봉숭아는 하루가 다르게 쑥쑥 키가 자라더니 드디어 빨강, 보라 고운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딸 김지민(26·학생)과 딸의 친구 김승혜(24·학생), 그리고 평소 동생처럼 지내는 미셸 장(45·오감도 대표)씨와 함께 봉숭아물을 들이며 보낸 주말 오후는 아주 특별한 빛으로 물들었다.
옛날부터 부녀자들이 손톱을 물들이는데 사용한 봉숭아(또는 봉선화)는 우리 민족과 아주 친숙한 꽃. 줄기와 가지 사이에서 꽃이 피며 그 우뚝하게 일어선 모습이 봉(鳳)의 형상을 했다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울 밑에서 선 봉선화야. 네 모습이 처량하다. 길고 긴 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 필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 반겨 놀았더라.’ 김형준 시 홍난파 작곡의 한국 최초 예술 가곡, ‘봉선화’는 일제의 압박에 처한 우리 나라 사람들의 저항을 봉선화에 비유해 민중의 울분을 토로했다.
이유원이 쓴 ‘임하필기’에 따르면 아이들에게 봉선화물을 들여 주는 것은 예쁘게 보이려 하기보다는 병마를 막기 위해서라고 한다. 사망률이 높았던 시절, 남녀 구별 없이 손톱에 귀신이 싫어하는 붉은 빛의 봉숭아물을 들임으로써 역귀와 질병으로부터 우리 몸을 보호하고자 했던 것이다.
사이먼 안(43·아이엠 카드 대표)씨는 손톱에 봉숭아물이 들여졌던 아침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여섯 살 때였을 거예요. 자고 일어났는데 손톱 끝이 감겨져 있는 거 있죠. 풀어봤더니 손톱에 빨갛게 물이 들어 있더라고요. 자고 있는 사이 누나가 물을 들여 준 거였는데 당시에는 저 말고 다른 사내애들도 그렇게 손톱에 봉숭아물을 들이곤 했었어요.” 먼발치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봉숭아 빛 추억으로 촉촉하게 젖어든다.
정원에 나선 그녀들은 바구니에 봉숭아 꽃잎과 초록 잎을 따 담는다. 닥지닥지 줄기 위에 매달린 봉숭아꽃은 분홍, 보라, 빨강, 색깔도 다양하다. 미셸 장 씨는 초록색 이파리를 꽃송이와 함께 따 백반, 굵은 소금과 함께 ‘콩콩’ 돌로 찧는다.
딸 지민이의 손가락 하나 하나에 찧어 놓은 봉숭아를 올려놓고 랩으로 싸고 무명 실로 묶어주며 성기순씨가 입을 뗀다. “우리가 자랄 땐 이런 랩이 없었어. 그래서 봉숭아물을 들일 땐 콩잎으로 싸고 무명실로 메곤 했었는데.”
10개의 손가락에 봉숭아 빻은 걸 올려놓고 실로 묶기까지 지민이는 그림처럼 조신하게 잘 앉아 있다. 손가락 끝이 얼얼해 오는 것을 참고 1시간이 지나니 손톱 끝에 봉숭아꽃이 곱게 피어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그 다홍 빛깔이 얼마나 고운지. 봉숭아물은 단순히 붉다는 단어로는 담을 수 없는 복잡함을 안고 있다.
타오르는 열정이라 하기에는 조금 못 미치고 밝은 오렌지색이 보여주는 철없는 조잘거림보다는 이미 많은 비밀을 알아버린 듯 성숙한 붉음. 크레파스로 칠한 것처럼 불투명하지 않고 반투명한 손톱에 고이 입힌 그 다홍색의 느낌은 가슴을 따스하게 한다.
“언니, 다홍빛 물이 다 빠질 때가지 손톱만 바라보고 있어도 너무 행복할 것 같아요.” 미셸 장 씨가 조선시대 미인도에 등장하는 여인네처럼 고운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여름에 들인 봉숭아물이 첫 눈 올 때까지 남아있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말, 정말이어요?” 앞으로 다가올 사랑에 대한 설렘으로 가슴 설레는 김승혜씨가 질문을 던진다.
올 겨울, 아니 내년 봄까지라도 그녀들 손톱 끝 봉숭아물이 지워지지 않고 조그만 초승달 모양으로 남아있었으면 좋겠다. 그때는 손톱 끝 다홍빛 물을 바라보며 지금보다 더 넉넉한 미소를 짓게 되기를.
봉숭아 꽃잎을 돌로 찧고 있는 미셸 장씨.
봉숭아 꽃잎은 동그란 자갈로 찧은 후 손톱에 올린다.
김승혜씨 손톱 위에 올린 봉숭아꽃잎.
봉숭아꽃 모종을 판매하는 곳
올림픽 타운 식물원
김창근 대표(65)는 8년 전부터 봉숭아꽃 모종을 내서 화원에 두었다.
다른 꽃을 구입하러 온 고객들이 반가운 마음에 이를 집어든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 가격은 1통에 1달러. 김씨는 한 달 정도 물만 잘 주면 꽃이 피어 물을 들일 수 있다고 말한다.
2800 W. Olympic Bl. Los Angeles, CA 90006. (213)386-6364.
봉숭아 모종을 구입하는 고객들에게 김씨는 백반(명반)을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백반은 대부분의 한약방에서도 구입할 수 있다.
글·사진 박지윤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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