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 20년만에 호러퀸 겁없는 변신…배우가 감수해야 하는것 아닌가요
김혜수 화보
인적없는 한산한 지하철 승강장, 이름도 으시시한 곡성역의 플랫폼에 덩그러니 분홍 구두가 놓여져 있다. 친구를 기다리던 여학생은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러 분홍구두를 신어 본다.
분홍 구두에 매료된 듯 여학생이 야릇한 한숨을 내뱉는 순간, 어디에선가 나타난 친구가 분홍구두를 훔쳐서 달아난다. 절망에 빠진 여학생 뒤에서 춤을 출 것처럼 신나게 길을 걷던 친구는 어떻게 됐을까. 그만 얼마 가지 못해 다리를 잘려 즉사하고 말았다.
도시의 괴담 같은 이 잔인한 이야기는 30일 개봉될 영화 ‘분홍신’(감독 김용균ㆍ제작 청년필름)의 오프닝이다. 안데르센의 ‘빨간 구두’에서 모티브를 따온 이 작품은 여자들의 숨겨진 욕망과 그 안에 도사리고 있는 잔인한 이면을 폭로한다. 그 어떤 공포 영화보다도 여성성을 극대화시켜 두려움을 선사하는 ‘분홍신’은 주연 배우 김혜수로 인해 효과는 배가 됐다.
배우 김혜수의 존재는 영화 속 분홍 구두와 비슷하다. 화면 안에 등장한 그녀는 아름다워지고 싶은 여성의 욕망을 한껏 자극하고 나선다. 마치 영화 속 분홍신처럼 말이다.
분홍 구두의 욕망에 사로잡힌 주인공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김혜수의 존재는 강렬하다. 이것이 바로 ‘성숙한 여자’ 김혜수의 힘이 아닐까. 실제로 만난 김혜수는 영화 속의 모습보다 훨씬 더 여성적인 매력을 물씬 풍겼다.
# 모성애를 지우고, 여성의 욕망을 드러내다
하늘하늘한 베이지색 원피스를 입고 들어선 김혜수는 멀리서도 바로 알아 볼 수 있을 만큼 아름다웠다. 당연히 촬영용 의상을 미리 입고 온 것이라 여기고 사진 촬영을 진행했으나, 알고 보니 단순한 외출복일 뿐이었다. 평소에도 이토록 아름답게 자신을 가꿀 줄 아는 여자는 언제나 거부할 수 없는 법이다. 마치 분홍 구두를 신은 여학생처럼 한숨이 터져나왔다. ‘아, 너무 아름답다.’
하지만 그녀의 진정한 매력은 오랜 연륜에서 나온다. 상대를 편안하게 할 줄 아는 배려와 지나치리만큼 솔직한 답변은 누구든지 쉽게 마음을 열게 한다. 올 12월이 되면 배우 생활을 한지 만으로 20년이 되는 그녀만의 장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일반적인 드라마 연기에 익숙한 배우에게 호러 영화는 대단한 도전일 될 수도 있다. 그만큼 극한 상황에 내몰려 과장된 연기를 하는 것이 노련한 배우들에게 오히려 어려운 주문일 수 있기에, 보통 호러 영화의 감독들은 신인 배우를 선호하게 마련이다.
“호러 영화의 주연들이 신인들이 주를 이룬다는 것은 최근에 알았어요. 기존 배우들을 꺼려하는 이유는 알 것 같아요. 하지만 매 장면을 촬영 할 때 그 설정에 충실하면 어려운 점도 없어요. 소리 지르고 무서워하고, 피를 뒤집어 쓰는 거요? 영화를 찍으면서 배우가 감수해야 하는 육체적인 고통 중의 하나 아닌가요?”
극중 김혜수가 맡은 역할은 태수라는 딸을 가진 엄마 선재. 결혼도 하지 않은 그녀에게 모성애를 가진 엄마의 역할은 또 다른 도전이지 않았을까.
“단순히 모든 것을 희생하는 엄마였으면 저도 힘들었겠죠. 경험해 보지 못한 거니까. 선재는 엄마이기 전에 여자이고, 딸과 대등하게 경쟁하는 사람일 뿐이예요. 그 점이 매력적이었죠.”
김혜수는 무정하리만큼 엄마의 본분을 잃고 분홍구두를 갖기 위해 딸을 밀쳐내기도 한다. 모성애가 지워진 엄마, 그녀에게 남은 것 본질적인 탐욕 뿐이다. 잔혹해 보이는 선재의 감정이 김혜수를 여성으로서 더욱 아름답게 하는 지점인 동시에, 그녀가 ‘분홍신’을 선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 여성은 모두 무엇인가에 집착한다
영화 ‘분홍신’의 선재는 신발 가게의 장식장을 거실에 들여놓을 만큼 신발에 집착하는 인물이다. 신발 패티시즘(집착하는 성향)은 여성들의 기본적인 성향인 것처럼 김혜수도 신발에 집착할까.
“신발을 싫어하는 여자도 있어요? 하지만 집착은 파멸의 지름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집착하지 않으려고 애쓰죠.(웃음)”
‘성숙한 여인’ 김혜수는 집착을 버릴수록 행복해 진다는 사실을 깨달은 지 오래지만, 단 한가지에 관해서는 집착을 버릴 수가 없다고 털어놨다. 그림, 사진, 음악, 패션, 인물 등에 관한 자료가 그러하다. 그녀의 집에는 컴퓨터가 2대가 있는데, 그 중의 한대는 6~7년 전부터 모으기 시작한 자료가 빼곡이 담겨 있다.
“어느 순간 자료가 재산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러니 멈출 수가 없더라구요. 마음에 드는 이미지, 그림, 사진을 모으고, 인물에 관한 바이오그라피, 뒷 이야기를 조사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라요.”
그렇게 모아 놓은 자료는 항상 새로운 작품을 할 때마다 도움이 됐다. ‘분홍신’을 촬영하면서도 새로운 자료를 찾을 것도 없이 보물상자를 열기만 하면 영감을 줄만한 것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만하면 파멸에 이르는 집착은 아니죠?“라며 웃은 김혜수의 연륜은 역시 탄탄한 내공에서 생겨난 것임을 확신하게 했다.
/서은정기자 gale23@sportshankook.co.kr
/사진=김지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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