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들의 독서모임
한국도서 기증하는 문화사절 역할도
그리스인 조르바’를 썼던 니코스 카찬차키스는 자신의 영혼을 살찌게 했던 두 가지 요소를 여행과 독서로 꼽았다. 성찰과 사색의 시간을 갖게 하는 독서. 햇살 아래 누워 책이 인도하는 세계로 떠나는 마음 여행의 기쁨이 얼마나 크면 독서삼매경이라는 표현이 생겨났을까.
더 이상 교육기관에 몸담고 있지 않은 우리들에게 독서는 거의 유일무이한 지식과 교양의 공급 루트다. 그 좋은 책읽기가 이처럼 힘든 것은 정도 차이지 우리 모두의 한계이자 고백일 터.
세상 모든 것이 마찬가지겠지만 독서야말로 시간을 따로 떼어두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이다. 혼자가 아닌 우리가 될 때, 함께 나는 새들처럼 보이지 않는 에너지를 공급받는 것은 책읽기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다수는 아니지만 함께 책을 읽고 다양한 의견을 교환하는 독서 클럽이 한인 커뮤니티에도 운영되고 있다. 가장 오랜 연륜을 자랑하는 모임은 인랜드 지역의 한마음 독서회(회장· 김상순). 처음부터 책을 읽자고 만난 모임은 아니었다고 한다.
10년 전 약 5가정이 주말마다 모여 저녁 식사도 함께 하며 가깝게 지냈는데 모이면 한국 정치와 사업 얘기만 반복하다보니 너무 모임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더란다. “우리 매 달 모일 때마다 책 한 권씩 읽고 와 얘기를 나누면 어때요?” 누군가 이런 제의를 했을 때 모두들 한 마디 반대 없이 동의했던 건 뭔가 창조적인 모임에 대한 갈구에서였다.
그로부터 10년째 매달 두 번째 일요일 저녁, 만남을 계속해온 한마음 독서회는 지난 일요일, 177차 모임을 가졌다. 오후 6시께 호스트의 집에 모여 식사를 나눈 뒤에는 마음의 문을 여는 싱어롱 시간을 갖는다.
특히 이번 모임 때는 기타를 연주하는 박춘수 회원, 크로마하프를 연주하는 김채숙 회원 덕에 더욱 아름다운 반주에 맞춰 멋진 싱어롱을 할 수 있었다.
다음 순서는 회원의 주제 발표. 보통 2명이 하는데 이번 달은 발제를 맡은 회원 하나가 독감에 걸리는 바람에 정재록 회원만이 발표를 했다. 그가 선정한 책은 강권중의 저서, ‘발가락 건강비법’. 자신과 회원들의 실생활에 구체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건강 서적을 골랐다.
그는 300여 페이지의 내용을 A4용지 4장 분량으로 요약해 회원들에게 나눠주고 살을 붙여 설명한다. 책의 요점은 발가락 마사지만 잘 해도 웬만한 건강은 회복될 수 있다는 것. 그는 책을 읽고 난 후 아내 차영희씨를 대상으로 실험했던 마사지 요법 시범을 회원들 앞에서 재현해 보인다. 40대로부터 70대까지 폭넓은 연령대로 구성된 28명의 회원들은 초롱초롱 눈동자를 빛내며 정재록씨의 시범을 지켜본다.
항상 이렇게 응용 서적만을 읽는 건 아니다. 이제껏 한마음 독서회에서 함께 읽었던 책들 가운데는 현각 스님의 ‘하버드에서 회계사까지’, 박경리의 ‘토지’, 사이쇼 히로시의 ‘아침형 인간’과 같이 소설, 에세이 등 다양한 장르가 포함돼 있다.
이날 모임 장소를 제공한 최제니(62·자영업·다우니 거주)씨의 서재에 들어갔다가 영어 문고판 도서들이 빼곡 책꽂이에 꽂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회원들 사이에서도 그녀의 영어 원서 다독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녀가 영어 소설을 원서로 읽게 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지금이야 한국 서적이 발에 채일 듯 흔하지만 22년 전, 한인 타운도 아닌 인랜드 지역에서 한국 책이 얼마나 귀했겠는가. 소설을 좋아하던 그녀에게 누군가가 영어 소설책을 한 박스 주었단다. 그 가운데 그녀는 시드니 셸던의 소설, 천사의 분노(Rage of Angel)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처음엔 모르는 단어를 다 찾아가며 읽으려니 아무리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그녀였지만 시간이 적지 않게 걸리더란다. 한 권을 모두 끝내고 난 뒤에는 시드니 셸던 소설을 모두 구해서 봤다. 한 권 읽는데 한 달 걸리던 것이 이제는 일주일도 채 안 걸릴 만큼 그녀의 책 읽기에는 가속도가 붙었다. 그녀는 처음 영어 소설을 보려는 이들에게 시드니 셸던의 소설을 많이 권한다. 깊이는 없지만 흥미진진하고 쉬운 영어로 쓰여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마음 독서회 모임에서도 해럴드 로빈스가 지은 ‘A Stone for Danny Fisher’를 원서로 읽고 발표한 적이 있다. 이제 그녀는 번역본이 있는 책일지라도 원서를 사본다. 번역본은 아무래도 맛과 멋이 원문만큼 잘 전달되지 않아서다. 화제의 베스트셀러 ‘다빈치 코드’ 역시 영어로 읽었다. “집사람은 그저 밤낮 책만 읽어요.” 남편 최일신씨(61·자영업)의 볼멘소리가 가만히 들어보니 실은 아내 자랑이다. 존 샌드포드, 존 그리샴, 로렌스 샌더즈 등의 소설을 많이 보는 그녀는 영어 원서 읽는 요령에 대해 의문이 있는 독자나 함께 영어 원서를 읽고 싶은 이들을 힘닿는 eo로 도와줄 것을 약속했다.
전화 (562)318-4458
한마음 독서회에서는 지난 2일 코로나시 도서관에 530여권의 한국어 도서를 기증하기도 했다. 앞으로 1,000여권을 더할 예정이라 한국도서 문고의 수는 더 늘어날 예정. 700여 가정이 거주하는 코로나에 한국도서 문고가 개설됐다는 것은 한인 사회와 주류 사회를 문화적으로 연결시키며 지역사회에서 인정받는 커다란 계기가 됐다. 지역사회 내에서 이렇게 영향력 있는 일을 가능케 한 것이 독서 모임이라니 대단하다.
정식 명칭은 따로 없지만 한인 타운에는 젊은이들이 주축이 된 독서 모임들이 몇 개 있다. 박용석(41·자영업)씨는 3년째 가까운 친구들끼리 한 달에 한 번씩 함께 책을 읽고 토론을 벌여오고 있다. 그간 이 모임에서 읽었던 책들은 공선옥의 ‘사는 게 거짓말 같을 때’, 폴 오스터의 ‘달의 궁전’,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 황대관의 ‘야생초 편지’ 등 여러 권.
신간이라도 다수의 독자들이 좋다고 검증한 책들을 고르는데, 돌아가며 선정을 하다 보니 때로는 이제껏 관심을 갖지 않았던 전혀 새로운 분야의 책들도 읽게 된다고. 자꾸만 굳어져가는 세계관, 가치관은 이런 폭넓은 독서로 유연성을 띠게 된다. 같은 책을 읽고 나서도 전혀 내가 보지 못한 면에 주목한 회원들과 대화를 나누며 우주의 행성만큼이나 다양한 개인의 세계를 깨닫는다.
정해일씨네 독서 클럽도 한 달에 한 번씩 모임을 갖고 있다. 현재 참석 인원은 약 7명 정도. 그간 브루스 커밍스의 ‘김정일 코드’, 최인호와 숭산 스님의 ‘대화’ 등 여러 권의 책을 함께 읽었다. “사실 한 달에 한 권 책 읽기가 쉽지 않은 게 현실이잖아요. 하지만 모임을 앞두고는 강제적으로라도 읽어야 하니까 1년이면 적어도 12권은 읽게 돼 좋은 것 같아요. 독서만큼 우리들의 세계관을 넓혀 주는 게 또 어디 있겠습니까.” 박민석(37·자영업)씨의 얘기다.
책은 우리들의 좋은 친구. 인간은 선택하는 정보에 따라 변화하는 존재다. 독서를 통해 습관과 행동, 언어가 바뀌어 인격과 사고, 운명이 바뀌는 경험을 해본 이들은 평생 책을 놓지 않는다.
빠듯한 시간 내에 효율적으로 책을 읽으려면 좋은 선택을 내릴 줄 알아야 한다. 독서의 목적에 따른 책의 선정뿐만 아니라 정독할 부분과 속독할 부분에 따라 시간을 달리 투자하고 때로는 과감히 책장을 넘겨야 하는 것이다. 또 다른 비법은 작가와의 대화. 나의 염려와 걱정을 모두 내려놓고 저자의 마음과 코드를 맞추면 글쓴이가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책의 행간에 녹아 있는 것을 읽을 수 있게 되고 우주적 지성과 만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발제자가 가져온 책을 뒤적이고 있는 회원.
한인 독서 클럽들
■한마음 독서회
대부분 리버사이드와 코로나 지역에서 정기 모임을 갖지만 타 지역 새 회원도 환영한다.
회비 매월 10달러. 저녁 식사 파트락 준비. 178차 모임 7월 9일(토).
이종운 총무 (951)237-5963.김상순 회장 (951)738-9523
■박용석씨네 독서 모임
매달 첫 번째 월요일 정기 모임. 모임 장소는 LA. 다음 달 모임에는 박노자 저, ‘하얀 가면의 제국’을 읽고 토론을 벌인다. 회비는 책값과 뒷풀이 비용.
(213)365-0009
■정해일씨네 독서 모임
매달 첫 번째 금요일 정기 모임. 모임 장소는 LA. 교양서적 위주. 회비는 책값과 뒷풀이 비용. (213)387-7400
글·사진 박지윤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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