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형란<주부>
지난주에는 학교에서 큰 아이 필드트립이 있어서, 자원봉사를 자청해 아이들과 스쿨버스를 타고, 시립도서관으로 향했다. 아이들은 버스에 타자 마자 재잘거리기 시작하더니, 마치 상자속 병아리들 처럼 쉴새없이 떠들었다. 도서관에서 돌아오는 길에 노곤했던 나는 잠시 눈을 감았는데, 오랫만에 버스 안에서 아이들 떠드는 소리를 들으니, 마치 한국에서 버스를 탄 느낌이었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 버스를 타고 학교를 다녔는데, 등.하교길의 버스는 정말로 콩나물 시루였었다. 버스 안에서 학교 친구들은 일분이 아까울세라 수다를 떨었는데, 우리들의 수다가 재미있다는 듯이 웃는 할머니도 있었고, 생활에 찌든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있는 아줌마도 있었고, 도저히 시끄러워서 견딜 수 없다는 듯이, 학생들 좀 조용히 하라는 아저씨도 있었다.
나는 그 무표정한 사람들 얼굴을 보며, 저 나이가 되면 무슨 재미로, 무슨 꿈을 꾸면서 살아갈까 늘 궁금했었다. 그렇게 아침 일찍 버스를 타고 학교에 오면 금방 출출해져서, 싸 온 도시락들을 시도 때도 없이 짧은 쉬는 시간에 먹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하루종일 학교에 앉아 있어야 했던 여고시절을 버티게 해준 건 바로 친구들과 수다떨며 도시락 먹던 즐거움이었다.
며칠전에는 아이들 학교 엄마중 하나가 친하게 지내는 같은 학년 엄마들을 브런치 초대를 해서, 오전 10시쯤 오라고 했는데 아침에 잠시 볼일이 있었던 나는 11시 45분쯤 갔다. 간단하게 브런치나 먹자고 해서, 예쁘게 차린 테이블에 우아하게 앉아 담소를 나누며 향긋한 커피와 머핀, 혹은 샐러드와 파스타 등을 먹을것을 상상하면서, 아침에는 잘 감지도 않는 머리까지 그날은 감고, 모처럼의 외출로 옷을 차려 입은후, 꽃 대신 먹는걸 더 좋아할 것 같아서 케잌을 하나 사들고 그 집을 들어간 나는 기절할뻔 했다,
아줌마들은 왜 이제야 왔냐면서, 아침을 굶고 10시부터 모여서 놀랍게도 오전 내내 삼겹살을 구워 먹고, 김치에 밥까지 볶아서 내가 도착하기도 전에 다들 이미 식사를 끝낸 후였다. 여고시절 시도 때도 없이 먹어대던 친구들의 얼굴이 포만감으로 나른해 보이는 그 아줌마들 얼굴위로 겹치는 순간이었다.
이십년전 버스 안에서 그렇게 수다를 떨며, 쉬는 시간에 도시락을 먹던 친구들은 다들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까? 생활에 찌들어 꿈 없이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듯이 보였던, 촛점 없는 눈으로 버스 창밖을 멍하니 내다 보던 그 아줌마 나이가 되어, 이 이역만리에서 아침 10시에 삼겹살을 구워 먹는 친한 아줌마들하고 앉아 수다를 떨면서, 내가 그 당시 그 친구들을 그리워한다는 것을 그들은 꿈에라도 알까? 아주 우연히 길에서 만나도 마치 며칠 전에 만난 사람처럼 스스럼없이 대할 수 있을 것만 같은데...
해마다 학기 초, 장래 희망란에 현모양처를 써 내면 왕따 당했던 그 꿈 많던 시절. 여학생들은 공부 잘 할 필요 없어. 나중에 어차피 솥 뚜껑 운전사 될텐데.다들 시집이나 잘 가라. 이렇게 농담처럼 말하는 선생님께 떼로 야유를 보냈던 여고생들이 이십년후 주부로 살면서, 아이들과 가정을 위해서 많은 것들을 체념하며, 이루지 못한 꿈들을 아쉬워 하며, 이렇게 가끔 모여 가슴속의 허기로 밥을 먹으면서, 아줌마들은 온갖 시름을 잊고는 한다.
외로운 이곳에서 부엌 칼 갈며 도 닦은 세월 어느덧 십년.그 기나긴 시간후에야, 행복을 가져다 준다는, 마음속에 살고 있는 파랑새를 나는 만난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무대위에서 화려한 불빛을 받으며 주연을 맡은 배우보다, 보이지 않는 구석진 자리에서 빛나지 않는 자기 자리를 지키며 다른 사람들을 위해 서 있는 많은 사람들이 더 아름다워 보인다.
세월의 힘은 수험생 시절도, 집에 갇혀서 아이 키우며 힘겨워 했던 시간들도 지나고 나면, 즐거웠던 추억으로 마음에 남아있게 하나보다. 나는 요즘 사소한 것에서 예전의 추억을 떠올려보며, 가끔 혼자서 즐거워하는 버릇이 생겼다. 이제서야 나는 일상에서 작은 행복을 찾으며 가볍게 살아 가게 된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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