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 홍준표 의원이 한국의 네티즌 사이에서 ‘떴다’고 한다. 부모가 미국에 단기체류 중 태어난 아이들이 국적을 포기할 경우 한국인으로서 누릴 수 있는 권리를 모두 박탈하는 법안을 추진하겠다는 발언 때문이라는 거다.
그 벼락인기가 이해가 간다. 경우야 어떻든 한국 국적을 포기하는 사람에 대해 시선이 곱지 않다. 한국의 일반적 정서다. 그런데 미국에 잠시 체류 중 아이를 낳고 군대를 보내지 않기 위해 국적을 포기한다. 그런 국적포기자들을 적극 손보겠다고 했으니 당연한 반응 같다.
미국에 살고 있다는 원죄(原罪) 탓인가. 정황을 알긴 하겠는데 뭔가 떨떠름한 느낌도 든다. 국적포기자, 다른 말로 해 미국 이민자 모두가 백안시되는 건 아닌지 싶어서다.
이민자란 무엇인가. ‘굳이’ 분류하면 두 가지 이름으로 불릴 수 있다. 초국적인(Transnationals)과 디아스포라(Diaspora)다. 보다 나은 삶을 추구해 자의로 한국을 떠났다. 트랜스내셔널이다. 1970년대 이후의 주류 이민으로, 미국과 캐나다 등지의 한인 대부분이 이에 해당한다,
디아스포라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조국을 떠난 사람들이다.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에 한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 대부분의 중국, 러시아, 일본 교포들로, 그 이민의 역사는 길다.
‘굳이’란 서두를 단 건 한국인 이민은 결국은 ‘코리안 디아스포라’란 개념으로 파악될 수밖에 없을 것 같아서다. 스스로 떠났다. 그러나 그런 결심을 내리게 된 시대적 상황을 감안하면 말이 초국적인이지 본질에 있어서는 디아스포라이기 때문이다.
‘코리안 디아스포라’란 이름에는 그러므로 19세기에서 21세기 이르는 격동의 시기에 한인들이 겪은 역사의 일그러진 모습이 모두 녹아 있다. 그래서인지 이 ‘디아스포라’라는 말에서는 어딘가 애절함 같은 게 묻어난다. 망향이라든지, 한(恨) 등의….
이민은 그러면 그 자체가 슬픔이고, 저주인가. 아니면 축복인가.
인류의 역사는 이민의 역사다. 끊임없는 이동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류역사에서 이민의 역사만큼 시대상황과 정서를 반영하는 것도 드물다. 정복의 역사에서, 또 종교, 문화 등 모든 역사에서 인간의 이동은 필수적이었다.
성서를 보아도 그렇다. 조상의 땅을 떠나는 창세기의 주인공들은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트랜스내셔널, 즉 초국적인들이다. 아브라함이 그렇고, 이삭이 그렇고, 야곱이 그렇다. 끊임없이 이동하는 이들의 삶은 고달픔의 연속이다. 그러나 하나같이 결국에는 축복이 임한다.
이후 계속 이어지는 이동의 역사를 성서는 줄곧 축복이란 범주 안에서 다루고 있다. 엑소더스가 그렇다. 고난의 대이동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민족적 정체성이 확립된다. 유일신 사상이 탄생한다. 역시 축복으로 귀결되는 모습이다. 뒤이은 유대인의 디아스포라는 더 큰 축복으로 이어진다. 엄청난 비극과 아픔 가운데 이루어진 민족의 흩어짐이다.
그러나 그 디아스포라가 있었기에, 다시 말해 지중해 세계 곳곳으로 흩어진 유대인들이 있었기에 복음전파의 세계화가 이루어진다. 축복의 대단원이라고 할까.
왜 축복인가. 성서는 믿음으로 설명한다. 현대의 사회학적 설명도 크게 다르지 않다. “어떤 상황을 실재라고 정의하면 그 결과로서 상황은 실재가 된다.” 미국의 사회학자 W. I. 토머스가 한 말이다.
중요한 것은 객관적, 물질적 조건이 아니고,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느냐 하는 것이다. 이민자 특유의 이런 믿음은 척박한 환경을 극복하고 결국은 축복을 이끌어낸다는 현대적 해석이다.
현대인의 삶은 새로운 노마드(Nomad)로 비유된다. 이동이 경쟁력이고 가치 창출의 기제로 여겨지고 또 이동의 미학이 칭송되면서다. 동시에 나오는 전망은 ‘21세기는 디아스포라 시대’가 된다는 것이다.
이민은 세계화 시대의 유동적 흐름이라는 시각에서 디아스포라는 글로벌 네트웍시대의 중요한 민족 자산이라는 개념으로까지 발전하고 있다. 보다 적극적이고 확대된 축복 관이다.
앞서의 질문으로 되돌아가자. 이민은 저주인가, 축복인가. 두 말할 것도 없다. 축복이다. 그러나 조건이 있다. 이 땅에 대한 기도와 믿음이 선행조건이다. 보다 나은 삶의 기회와 높은 삶의 목표를 향해 이동하면서 이 사회에 이바지한다는 염원이자, 신념이다. 한 마디로 이민정신이다.
온통 퇴폐의 물결이다. 게다가 잇단 초대형 사기극이다. 생계형 사기가 아니다. 치밀하게 짜여진 ‘한 탕’형의 사기극이다. 축복이 저주로 변하지 않을지 두려움이 들 정도다. 뭔가 때가 되지 않았나 하는 예감이다. 대각성 운동이다. 축복의 통로인 이민정신을 회복하자는.
옥 세 철
<논설위원>
secho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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