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릿속에 떠오르는 글 상을 묶어두려 연필을 찾았다. 손이 갈 만한 곳을 뒤져보았지만 눈에 띄지를 않기에 급한 대로 볼펜을 쥐었다. 좀 전까지 잡힐 듯 맴돌던 단어들이 하나 둘씩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더니 우르르 흩어져 버렸다. 연필을 사용해야 글이 잘 풀리는 버릇이 나에게 있기에 지금같이 급할 때는 답답함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글쓰기를 즐기던 때부터 지금까지 나를 붙잡고 늘어지는 버릇이다. 종이 위에 연필심이 사각사각 굴러다니는 소리와 손끝에 전해지는 느낌이 기분을 상쾌하게 해 주며 머릿속에 자극을 준다. 연필로 쓰고, 지우개로 고쳐가며 몇 번씩 종이에 반복해 옮기다보면 팔이 아프고 글씨체도 엉망이 되지만 그 보상으로 글의 흐름은 부드러워짐을 깨닫게 된다. 요즘 들어 쓸데없는 고집이요, 불필요한 습관이고, 버려야 할 버릇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벗어나지가 쉽지 않다.
그 동안 글을 쓰는 목적은 변했지만 연필을 즐기는 것은 그대로 이다. 굳이 따지자면 초등 학생 시절에는 말로 옮기기 위해서였다. 웅변을 했었는데 내가 말하고자하는 내용을 원고지 위에 풀어 적었었다. 정성 들여 또박또박 쓴 글에 선생님이 빨간 볼펜으로 틀린 부분을 지적해 주시면, 다시 고쳐 원고지 위에 정서를 했다. 손에 들고 다니며 달달 암기를 한 후 목소리에 강약을 넣어 변화를 주고, 적당한 부분에 제스추어를 취하면서 내 주장을 전달해야 했다. 볼펜과는 달리 연필로 쓴 것은 손때에 닳고닳아 시간이 지나면서 글씨가 흐려져 보이지 않게 되지만 이미 눈에 익고 머리에 담았기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다.
중학생 때에는 보이기 위해서 글을 썼다. 봉긋 솟아오르는 가슴처럼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무지갯빛 꿈이 부끄러움을 머금고 머리를 슬쩍 내밀던 시기였다. 예쁜 노트에 명시를 적어 넣고 그림으로 장식한 후 친구들과 돌려보는 것이 유행이었다. 누구의 것이 잘 꾸며졌느냐가 평가의 기준이 되고, 뒷장의 소감 난에는 읽은 사람의 명단이 많을수록 인기가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었다.
손재주가 있는 친구들은 전시를 해도 될 정도로 잘 만들었고,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심야 라디오 프로의 신청엽서에 뽑히기 위해 앞 다투어 보냈었다. 색색의 볼펜과 물감을 이용했지만 나는 연필을 고수했다. 내 나름대로 남들과 다르다는 자부심으로 총천연색의 무리 안에서 흑백의 묘미를 살린다고 고집을 했었다.
고등학생 때는 어설픈 겉멋이 나를 부추겼다. 문학을 공부한다는 허영에 들떠 기성작가들이 한다는 행동을 흉내내려 했었다. 책상 위에 원고지를 잔뜩 쌓아 놓고 작은 네모 칸을 하나씩 채워 나가다 시상이 막히면 작은 칸 안에서 답답하게 눌려 있는 단어를 지우개로 지웠다. 그것도 마음에 안 들면 두 손으로 마구 구겨서 방바닥으로 던져 버렸다. 파지가 많이 나서 등뒤에 많이 쌓일수록 좋은 글이 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열심히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은 자기 만족에다 과시였는지도 모른다. 대학시절이나 직장 생활에서도 다른 것은 볼펜으로 했지만 글을 쓸 때면 연필이어야 했다.
내가 연필을 좋아하는 것은 지울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서이다. 볼펜이나 만년필은 지우거나 고칠 수 없지만 연필은 수정이 가능하기에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내 안에 든 생각과 사상 혹은 철학 등을 밖으로 끌어내는 것이기에 어렵고 힘든 작업이다. 인생이 시행착오를 겪으며 경륜을 쌓고 그 깊이를 터득해가듯 글쓰기도 마찬가지이다. 어설픈 눈으로 바라보고, 설익은 마음으로 느낀 것을 표현해야 하기에 물 흐르듯 단숨에 글을 완성할 수가 없다. 초고를 마친 후 수정을 거듭하면서 나만의 색깔을 찾아나가고 문장도 훨씬 매끄러워진다. 그러기에 연필이 글쓰기에 적격이라고 생각한다. 실패할 것을 미리 계산에 넣기에 좌절도 덜하고 큰 실망을 하지 않고 고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복을 거듭하다보면 습관이 되어 몸에 배이게 된다. 너무 익숙해 의식적으로 행동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우러나오는 움직임들이 바로 그 것이다. 그 사람의 성격을 나타내고 타인에게 개성으로 보여지고 남과 다른 색깔을 띄게 만드는 것이 바로 습관에서 나오는 행동들이다. 그러다 보니 환경과 경험을 벗어나지 못하고 습관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뱅뱅 돌게 되는 단점이 있다.
요즘은 컴퓨터가 발달되어 널리 사용되고 있다. 연필로 쓰여진 글보다 컴퓨터로 활자화된 글 이 읽기도 편하고 정리된 느낌이라 보기에도 좋다. 연필로 쓴 내 글도 컴퓨터로 정리된 뒤에 보면 내용자체가 달라 보이는 착각이 든다. 글이란 내용도 중요하지만 보여지는 느낌 또한 무시할 수가 없나보다.
친한 문우는 컴퓨터 앞에 앉아야만 글 상이 떠오른다며 나에게 그런 습관을 들여 버리고 권유를 한다. 연필로 쓰다보면 팔도 아프고, 어차피 나중에 컴퓨터로 옮겨야 하니 비능률적이라고 했다. 그녀의 말에도 일리가 있어 글 상이 떠오를 때 그 앞에 앉아 보았지만 스크린 보랴 글자판 보랴 정신이 분산되어 번번이 실패를 해 습관이 무섭다는 것을 실감했다.
아직까지는 연필과 지우개 그리고 원고지를 향한 마음과 습관을 바꿀 수가 없나보다. 컴퓨터에 글을 옮기고, 원고지로는 몇 장정도 되나 가름해보기 위해 도구란에 있는 원고지로 옮겨 보기도 한다. 지금도 원고지를 구할 수 있다면 책상 위에 가득 쌓아놓고 싶다. 사각거리며 귀를 간지럽히는 연필로 그 안을 가득 채운다면 좋은 글이 나올 것 같다. 조상 님들이 ‘문방사우’라며 필기 도구를 벗처럼 즐기시던 것처럼 나에게도 연필과 지우개 원고지가 그렇다.
그러나 무시 할 수 없는 것이 시대의 흐름이니 컴퓨터에 직접 글을 풀어내려는 노력도 하고 연습을 해서 차츰 바꿔 나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컴맹’이라는 말로 고집과 습관을 미화시키다보면 너무 뒤쳐질 것이니 고쳐야될텐데...
김현숙
약 력
서울 출생
<수필문학> 신인상
제1회 재외동포문학상
꽁트부문 입상
재미수필문학가협회
<퓨전수필>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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