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가 자리바꿈을 준비하던 지난 몇 주간 여러 가지 모습의 죽음이 이어졌다.
한창 일할 나이에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은 치과의사 이익주씨의 안타까운 죽음, ‘정직하고 친절한 코리안’을 몸소 실천해 주변으로부터 ‘코리안 엉클’(Korean Uncle)로 칭송을 받던 양재웅씨의 비참한 죽음, 그리고 갑자기 요절한 동네친구 최군의 어이없는 죽음.
원칙주의자로 과묵했던 양씨는 그가 가주식품상협회장을 할 때 필자와 만났는데 필자의 칼럼이 나갈 때면 전화를 걸어 소감을 나누었던 터라 양씨의 죽음에 대한 충격은 너무 컸다. 지금도 굵직한 그의 음성이 귀에 들리는 듯 생생하다. 치과의사 이씨도 평소 성실하고 검소한 생활과 남을 돕는 일에 앞장 서 지인들의 안타까움을 사고 있다.
졸지에 간 두 사람에 대한 한인들의 끝없는 애도 물결이 그들이 가꾸었던 아름다운 삶을 짐작케 한다.
고향 친구 최군은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모두가 떠난 고향에 남아 집안 대소사를 도맡아 챙겨주던 형 같은 친구였기에 그의 요절은 너무나 큰 아픔으로 다가왔다. 농사를 짓던 최군은 언제부터인가 전기 기술자가 돼 고향 읍내에서 전파상을 차려 생활기반을 다졌으나 얼마 전 갑자기 쓰러져 두 자녀와 부인을 남기고 짧은 인생을 황소처럼 일만하다 갔다. 필자가 고향에 왔다는 소식만 있으면 늦은 밤에도 오토바이를 타고 쏜살같이 찾아와 덥석 손을 잡아주던 정이 그립다.
죽음은 그 죽음 곁에 있는 많은 사람에게 충격과 슬픔, 회한과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죽은 자보다 남은 자의 의식 속에 오래오래 이어진다.
불교에서 전해지는 남은 자를 위로하는 얘기 한 토막.
한 여인이 사랑하는 외아들을 잃고 슬픔에 몸부림치다 부처님을 찾았다. 여인은 부처님에게 죽은 아들을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부처님은 여인에게 죽음의 슬픔이 없는 집을 찾아 겨자씨를 얻어오면 그때 아들을 살려주리라 약속했다. 이 여인은 온 마을을 돌고 돌아 죽음이 없는 집을 찾아 헤맸다. 그러나 어느 곳에도 죽음이 없는 집은 없었고 죽음의 사연들 모두 아팠다.
이 여인이 부처님께로 돌아올 즈음 죽음으로 인한 이별이 자신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닌 모두의 것임을 깨닫고 슬픔과 위로를 달랬다.
성경도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 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이 결국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라’ 일러 죽음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지혜를 암시했다.
죽음은 언젠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영원히 살 것 같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죽음에는 순서도 없고 예고도 없다. 이것이 죽음의 법칙이다.
누군가 죽음을 주머니 속의 유리잔에 비유했던가. 우리는 주머니 속에 든 유리잔 같은 존재다. 언제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깨질지 모를 일이다. 그래서 장자는 ‘삶과 죽음은 동반자’라고 했고 유대인들은 ‘내일 죽을 것처럼 뜨겁게 일하라’고 가르쳤다. 수천년 동안 박해와 고난의 세월을 이기고 살아온 그들만이 깨달은 ‘삶의 원칙’이다. 그들에겐 오늘만 있을 뿐이다.
송년(送年). 또 한 해가 간다.
허리띠를 졸라매고 힘차게 시작했던 갑신년 한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고 있다.
서울에서 만난 성공한 한 선배가 “과장 때는 경영서적을 자주 읽었다. 부장 때는 역사서적을 자주 읽었고 이사가 되어서는 철학서적을 가까이 하게 되더니 사장이 된 후에는 종교서적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더라”고 들려준 한마디가 생각난다.
송년의 길목에서 정처 없이 달려온 삶의 수레를 잠시 세우고 먼저 간 이들의 삶을 조망해 보면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자신을 한 번 돌아보자. 그리고 ‘내가 누구인가’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져보자. 녹슨 곳은 갈고 닦고 휴식도 취하고 결단도 하고 봉사도 하고 더 진실한 삶을 다지고 보이지 않는 영원도 준비하자.
권기준<부국장 대우·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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