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둘로 나눌 수 있다. 자유사회와 공포사회다. 어느 사회에 속했는가. 간단한 시험으로 알 수 있다. 광장에 나아가 마음껏 소신을 밝힌다. 체포의 위험이 없다고. 그러면 자유사회다.
무슨 말이야. 그렇게 함부로 떠들다가 잡혀가려고. 체포 위험이 있다는 이야기인가. 그러면 그 사회는 공포사회, 더 정확히 하면 공포를 축으로 움직이고 있는 사회다.
세계적인 인권운동가 샤란스키가 밝힌 공식이다. 소련의 반체제 유대인 출신이다. 그러므로 공산 전체주의의 속성을 온 몸으로 경험한 그다.
샤란스키에 따르면 공포사회의 구성원은 기본적으로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그 체제를 믿는 자다. 말하자면 당성이 강한 공산당원 같은 존재다. 두 번째는 겉과 속이 다른 체제 순응자다. 세 번째는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 한 마디로 반체제 그룹이다.
겉과 속이 다른 체제 순응자의 모습을 샤란스키는 어릴 때의 경험을 통해 이렇게 설명한다. 스탈린이 죽었다. 사적으로는 몹시 기뻤다. 공적으로는 그러나 슬퍼해야 한다. 그래서 조문대열에 참여했다.
이 공포사회는 내재적으로 불안정한 사회다. 그 체제를 신봉하는 자들의 숫자가 적기 때문이다. 국민적 지지가 뒤따르지 않는 결과다. 체제유지를 위해 리더는 항상 뭔가를 획책해야 한다. 그 하나가 외부의 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위기감을 조성해 체제를 유지하는 게 그 목적이다.
두 번째 아이를 임신했다. 단지 그 때문에 공안에 끌려가 정신병동에 감금됐다. 고문을 받고 아이는 강제로 지워졌다. 직장에서도 쫓겨났다. 그리고 노동 수용소로 보내졌다.
한 자녀 낳기 운동의 희생자 스토리다. 인구과잉을 막기 위한 운동이다. 이를 어긴 사람에게는 상당한 경제적 불이익이 따른다. 그 정도가 아니다. 강제 낙태에, 강제 불임시술도 예사다.
13억으로 인구는 정체됐다. 그러나 온갖 후유증 투성이다. 프라이버시란 아예 없다. 인권유린에, 공공연히 살인이 저질러졌다. 희생은 주로 여자 어린아이에게 돌아갔다. 그 결과는 122대 100이라는 엄청난 불균형의 남녀 구성비다.
도광양회(韜光養晦)라고 했나. 빛은 감춘 채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힘을 기른다. 경제 발전에 전력을 기울이기 위해 불필요한 마찰을 피한다는 전략이다. 이 ‘도광양회’를 대외전략의 기조로 삼아 엄청난 경제 발전을 이룩했다.
오직 경제성장의 실리만 추구하며 평화굴기(平和堀起)의 기치를 내걸었다. 그 동안 외부에 비쳐진 중국의 얼굴이다. 미소를 띠고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다른 중국이 도사리고 있다. 공포사회다.
11월부터 이미 한파는 예고돼 있었다. 문화혁명 때를 방불케 하는 문구가 나돌았다. 지식인들에 대한 관영매체들의 경고가 쏟아지기 시작한 것. 그리고 체포선풍이 불어닥쳤다. 펜클럽 회장이 연행됐다. 기자들이 구속됐다. ‘양심의 소리’들에게 함구령이 떨어졌다.
최악의 상황이다. 베이징의 한 지식인이 전하는 말이다. 뭔가 초강경의 흐름이 감지되고 있다는 거다. 요주의 지식인들의 명단이 하달되고 인터넷 검열도 강화됐다. 중국판 싱크탱크라고 할까. 그런 기관들도 폐쇄됐다. 북한의 김정일 체제를 비판하는 논문을 실었던 베이징의 유명 월간지도 문을 닫았다. 정치평론가들에게도 족쇄령이 내려진 것이다.
대규모 민중폭동이 빈발했었다. ‘제4 세계’ 주민으로 불려질 정도로 빈곤에 찌든 농민들. 하루 품팔이로 전락한 유맹의 무리. 이들의 잇단 시위에 지식인들이 참가했다. 그리고 그들이 맞은 참상을 글로 발표해 베스트 셀러가 됐다.
이에 대한 과잉반응인가. 후진타오와 원자바오. 중국 공산당의 제4세대 지도층이다. 이들에 대한 기대는 컸었다. 보다 개방적인 개혁가로 비쳐졌었기 때문이다. 그 기대가 무너진 것이다.
장쩌민과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이상 언론에 대한 유화정책이 필요 없게 됐다. 후진타오에게로의 권력 집중이 불러온 사태라는 분석이다. 다른 지적도 있다. 그들의 경험으로는 다른 길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4세대가 지나도 공산당은 공산당이라는 말이다.
모택동 시대, 공포사회로의 회귀는 그러므로 당연한 귀결일 수도 있다는 지론이다. 소문이 벌써 구구하다. 쿠바나, 북한처럼 표현의 자유를 철저히 통제해야 한다. 이런 건의도 나왔다는 것이다.
공포사회의 결말은 그러면 어떻게 이어지나. 소련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결국은 무너지고 만다. 경착륙이다. 그래서인가. 후진타오의 중국이 브레즈네프 시대의 소련과 비교되는 게.
스스로를 파괴시킬 씨앗이 그 체제 내에서 배태되고 있는 가운데 불안한 안정을 누린 그 시대 말이다. 대륙에 불어닥친 한파가 예사롭지 않게 느껴진다.
옥 세 철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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