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소련 제국의 몰락은 20세기 후반의 가장 큰 사건이다. 무엇이 이를 가능케 했는가. 여러 요인 중 아프가니스탄에서의 패전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것이 많은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그럼에도 어떻게 중세적 유목민들이 세계 최강의 군사 강국을 이겼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아프간 전쟁의 실상을 흥미롭게 파헤친 ‘찰리 윌슨의 전쟁’(조지 크릴 저)을 소개한다.
“역사는 확신 가진 소수가 만드는 것”
처음 소련 이긴 아프간전 비화 공개
전후 미국 배신이 지하드 전사 키워
역사는 때로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발전한다. 소련 제국의 몰락에 이름 없는 텍사스 민주당 출신 연방 하원의원이 엄청난 기여를 하리라고는 누구도 몰랐으리라. 찰리 윌슨은 개인적으로 문제가 많은 인물이다. 전형적인 플레이보이 알콜 중독자에 음주 운전으로 사고를 내고 도망친 적도 있다. 그가 47세 되던 해인 1980년에는 라스베가스에서 쇼걸들과 마약을 함께 하다 발각이 나 정치 생명에 종지부를 찍을 뻔하기도 했다. .
어린 찰리 윌슨은 의협심이 강한 소년이었다. 어려서부터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약자가 괴롭힘 당하는 것을 눈뜨고 보지 못했다. 한번은 옆집에 사는 시의원이 윌슨이 사랑하는 강아지가 잔디밭을 어지럽힌다고 유리가루를 먹여 죽이자 “이 사람은 개를 죽인 인물입니다”라고 쓴 전단을 집집마다 돌려 결국 낙선시킨 일이 있다. 해군에 복무한 후 정계에 진출한 것도 약자를 돕겠다는 정신의 발로였다. 윌슨은 처음 워싱턴에 와 이오지마에서 미군 해병들이 성조기를 들어올리는 조각상을 보고 자신도 이들처럼 위대한 일을 해내겠다는 결심을 굳힌다.
그가 아프간과 인연을 맺게된 것은 우연한 해외순방 길에 파키스탄 내 설치된 아프간 난민 병원을 방문하면서부터다. 소련군의 무자비한 폭격으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사지가 절단된 참상을 목격한 그는 자기가 세상에 태어나서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그 자리에서 자기 피를 헌혈한 그는 그토록 처참한 처지에 빠진 난민들이 원하는 것은 의약품이나 동정이 아니라 자기 나라를 침공한 러시안 인들을 죽일 수 있는 무기라는 것을 알게 된다.
워싱턴으로 돌아온 그는 연방 하원 예산결산 위원회 위원이라는 직책을 이용, 1979년 소련의 아프간 침공과 함께 시작된 CIA의 아프간 공작 지원금을 늘리기 시작한다.
하원 예산위는 막강한 자리다. 1980년 당시 수백만 달러에 달하던 지원금을 윌슨이 몇 배씩 늘리자 CIA 쪽에서 오히려 난색을 표시했다. 당시만 해도 미국이 아프간에서 소련을 이길 수는 없으며 아프간 전의 목표는 기껏 해야 소련을 좀 성가시게 구는 정도라는 것이 정보부와 미 조야의 의견이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에 성공한 후 한번도 져 본 일이 없는 ‘붉은 군대’를 오합지졸에 불과한 아프간 인들을 이용해 무찌르겠다는 것은 현실성이 없으며 괜히 아프간 전을 지나치게 확대했다 소련이 파키스탄까지 침략하는 구실을 줘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무자헤딘을 돕겠다는 종교적 신념에 불타는 윌슨은 CIA의 저항을 무릅쓰고 아프간 예산을 계속 늘려나갔다. 그 결과 아프간 전이 절정이던 80년대 중반에는 처음보다 100배 이상 늘어난 5억 달러 선까지 이르게 된다. 정권이 카터에서 레이건으로 넘어가면서 행정부 분위기는 많이 달라지기는 했으나 레이건 행정부의 우선 관심사는 아프간이 아니라 미국과 인접한 니카라과였다. CIA도 콘트라 지원에만 신경을 썼지 아프간은 뒷전이었다.
CIA 내부에 윌슨과 같은 생각을 가진 인물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스 계 2세인 거스트 아브라코토스가 그 사람이었다. 부모를 받아준 ‘위대한 나라’ 미국에 대한 감사와 ‘악의 제국’ 소련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찬 그는 능력 있는 첩보원이었으나 창립이래 CIA를 주도해 온 아이비리그 계열이 아니라는 이유로 찬밥 신세였다. 그러나 윌슨과 한번 만난 후 의기 투합해 아프간 공작의 총책임을 맡게 된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처럼 소련을 멸망시키겠다는 의지로 똘똘 뭉친 그 앞에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한다. 그 중에서도 아프간 전쟁을 성공으로 이끄는데 제갈공명과 같은 역할을 한 사람이 마이크 비커스다. 역시 체코 계 이민자 출신인 그는 소련의 코피를 터뜨리겠다는 굳은 결심과 장기적이고 종합적인 관점에서 전쟁을 보는 전략가의 눈을 함께 갖추고 있었다.
그는 아프간에서 미국이 이기기 위해 매년 얼마만한 병력을 지원하고 어떤 무기를 제공하며 어떤 작전을 짜야 하는가를 알고 있었다. 그는 군수품을 지원할 때도 전투에 필요한 양뿐만 아니라 아프간 반군이 재미로 쏘는 총알의 개수, 암시장에 내다 팔 물량까지도 계산하는 치밀함을 보였고 스위스 은행 구좌로 돈을 보내는 방법, 무기를 어떻게 위장해 수송하는가에서 무자헤딘 가족들에게 생활비를 대주는 세세한 일까지 신경을 썼다.
그가 도입한 무기 중 소련군에 치명적 타격을 입힌 것은 스팅어 미사일이다. 남가주 랜초 쿠카몽가에 공장을 둔 제네럴 다이내믹스 사 제품인 스팅어는 아프간 전에서 첫 선을 보여 혁혁한 전과를 거뒀다. 이 미사일이 도입되기 전 아프간 반군의 공포의 대상은 소련의 하인드 헬기였다.
그러나 스팅어가 출현한 후 사태는 역전됐다. 어깨에 둘러매고 방아쇠만 당기면 미사일이 발사되는 이 신병기는 소련 비행기가 나타나기만 하면 박살을 냈다. 80년대 중반 이 무기를 사용한 이래 매일 한 대의 소련 비행기가 격추됐다. 소련 전투기 한 대 가격이 2,000만 달러인데 스팅어 한 발은 6~7만 달러에 불과했으니까 돈으로만 따져도 소련은 엄청난 손해를 본 셈이다.
그러나 스팅어의 출현은 전략적으로도 소련의 아프간 점령을 불가능하게 했다. 아프간 국토의 대부분을 게릴라 손에 넘겨준 채 공군력의 우위로 그나마 버텨왔는데 스팅어의 위력을 맛 본 후 소련 파일럿들이 저공 비행을 하려 하지 않아 공군은 무용지물이 된 것이다.
소련 수뇌부는 더 이상 아프간에서의 손실을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 1988년 철군을 결심하고 다음 해 1월 10년 간 점령해왔던 아프간을 떠난다. ‘소련의 베트남’으로 불리는 아프간 전쟁은 물질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소련에 엄청난 타격을 입혔다. 2만8,000명의 젊은이를 희생해 얻은 것이 무엇인가 하는 비판과 함께 지도부의 정통성이 치명적인 흠집을 입었다. 소련이 아프간에서 물러난 후 불과 10개월만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그 후 2년 후 소련 자체가 해체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아프간 전은 베트남 이후 최대의 미 비밀 전쟁이었다. 그러나 아프간 전의 뜻밖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 실상은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소련은 소련대로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고 싶지 않고 미국은 미국대로 9/11 테러 후 오사마 빈 라덴을 비롯한 회교 성전의 용사를 길러낸 것이라는 게 자신이라는 것을 알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아프간이 그 후 지하드의 온상이 된 것은 미국이 아프간에 개입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랜 내전으로 황폐한 아프간을 버렸기 때문이라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아프간 인들에게 군사 장비를 제공하고 훈련시켜 소련을 꺾게 해 기고만장하게 한 후 배신함으로써 이들로 하여금 미국을 미워할 명분과 미국과 싸워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줬다는 것이다.
‘찰리 윌슨의 전쟁’은 그동안 가려졌던 아프간 전쟁의 비화를 흥미진진하게 알려줄 뿐 아니라 역사는 그저 생기는 것이 아니라 확신을 가진 소수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점을 확인시켜준다. 이 책이 수개월 째 넌픽션 부문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올라 있는 데는 그만한 까닭이 있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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