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선 언제쯤 첫 여성 대통령이 탄생할까.
“빠르면 2008년”이라는 대답이 적지 않다. 물론 빌 클틴턴 전 대통령의 부인 힐러리 로댐 클린턴 상원의원을 염두에 둔 답변이다.
미국의 언론들도 선거가 끝나기 무섭게 힐러리 의원을 2008년 대선에 나설 가장 유력한 민주당 주자로 꼽았다. 사실 심각한 인물난을 겪고 있는 민주당 내에서 전국적 지명도와 정치력을 갖춘 그녀는 ‘군계일학’처럼 돋보이는 존재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선거가 화두로 떠오를 때마다 그녀의 이름이 거의 자동 반사적으로 튀어나온다.
힐러리가 남편의 재집권 말년인 지난 2000년 연방상원에 도전장을 던졌을 때부터 정계 평자들은 그녀의 정치적 야심이 백악관을 겨누고 있다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말하자면 힐러리 의원은 자타가 공인하는 ‘준비된 여성 대통령 후보’ 1순위인 셈이다. 일각에서는 차기 국무장관으로 지명된 흑인 여성 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대권에 근접한 공화당의 ‘다크호스’로 꼽기도 하지만 ‘상품성’이라는 측면에서 아직은 민주당의 힐러리 의원에 비길 바가 못된다.
그렇다면 실제로 힐러리 의원이 대선에 출마할 경우 당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가장 단순한 수학적 확률로 따지자면 50%가 되겠지만 정치판의 상수와 변수까지 상정한 정치역학 방정식은 그리 간단치가 않다.
시사주간지 뉴스위크지의 정치인 인물평 담당 여성 편집인인 머린다 헤넨버거는 최근 칼럼에서 ‘힐러리 대통령’은 잠꼬대 같은 소리라고 일축했다. 그녀는 존 케리 민주당 대통령후보의 부인 테레사 하인즈 케리가 “단지 전통적인 여성상에서 벗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남편의 선거전 기간 내내 부당한 공격을 당했다”며 이처럼 “보수적인 분위기 속에서 어떻게 여성 대통령이 탄생할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힐러리 의원이 ‘준비된 대통령 후보’인지는 몰라도 보수화 된 정치 환경에 젖어든 미국민은 여성 대통령을 맞이할 만한 마음의 준비조차 되어 있지 않다는 지적이다.
2004년을 기준한 유권자의 성비는 여성이 남성보다 높다. 따라서 2008년에 힐러리 의원이 출마하고 여성 유권자가 대동 단결해 그녀에게 표를 찍어준다면 미국은 여성 대통령의 탄생이라는 헌정사의 신기원을 이룰 수가 있다. 하지만 이건 그야말로 ‘순수 몽상’에 불과하다.
이제 서두에 던진 질문을 조금 바꿔보자. 앞서 언급한 헤넨버거의 주장이 맞다면, 도대체 언제쯤 ‘미즈 프레지던트’를 용인하는 진보적 정치환경이 마련될까.
이 질문에 우회적 답변을 제시한 인물이 있다. 대선을 앞두고 반 부시 영화인 ‘화씨 9/11’을 공개해 공화당 진영의 미움을 독차지했던 마이클 무어 감독은 최근 “히스패닉을 중심으로 한 소수계 인구의 팽창으로 50년 후 미국의 정치 환경이 혁명적으로 바뀔 것”이라며 부시 대통령의 재선으로 잔뜩 낙심한 민주당 지지자들에게 “손목을 그어 자살할 생각일랑 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무어 감독은 센서스국의 통계자료를 인용, “2050년에는 미국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을 소수계가 차지하게 된다”며 “50년은 그리 긴 세월이 아니다”고 말했다. 그는 올해 선거에 참여한 남녀 백인 유권자들의 78%가 부시 대통령에게 표를 던졌다고 지적하고 한동안 백인 보수표가 대선 결과를 좌우하겠지만 50년 후면 전세가 역전될 것이라는 논리를 펼쳤다.
그러나 무어 감독이 그려낸 이 기발한 장기전망을 뒤집어 보면 앞으로 오랜 기간, 공화당 천하가 계속될 것이라는 짙은 체념이 그 바탕에 깔려 있다.
부시 대통령이 “이번 선거를 통해 국민으로부터 ‘대임’을 부여받았다”며 “집권 2기중 환원 불가능한 수준의 보수혁명을 이루어 내겠다”는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데 비해 대선 연패 충격에 빠진 민주당의 대응은 너무도 무력하다. 사나운 시절, 우 ‘백호’는 포효하는데 균형을 잡아줄 좌 ‘청룡’은 보이지 않는다.
이강규<부국장 대우·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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