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우경화 상당기간 지속될듯
전통적인 잣대로 재면 2004년 대선은 부시에게 불리한 요소가 많았다. 사상 최대의 재정 무역 적자, 후버 대통령 이후 최초의 일자리 감소, 이라크의 치안 부재, 묘연한 대량 살상 무기 행방, 아부 그라이브 인권 유린 등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시는 여유 있게 경쟁자를 따돌리고 재집권에 성공했다. 그 가장 중요한 이유로 유권자들의 보수 성향이 지적되고 있다. 한 때 멸종 위기에 몰렸던 보수주의가 어떻게 지금 미국의 주도적 이념이 됐는지를 파헤친 ‘우파들의 나라’(The Right Nation, 450면 : 존 미클스웨이트/에이드리언 울리지 저)를 소개한다.
<민경훈 논설위원>
미 건국 이념부터 보수성향 짙어
우파 사상 사회 각분야에 뿌리내려
영국의 격조 있는 시사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의 미국 편집장인 존 미클스웨이트와 워싱턴 특파원 에이드리언 울리지는 “미국 내 주요 인사 중 만나 보지 않은 사람이 없고 미국에 관한 주요 저술 중 읽지 않은 책이 없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미국 통이다. 이들이 미국을 취재하며 얻은 경험과 지식을 모은 ‘우파의 나라’는 미국 내 보수주의의 뿌리를 광범위하면서도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이들에 따르면 50년 전만 해도 미국에 진정한 보수주의 이념은 존재하지 않았고 ‘보수파’라는 단어 자체도 욕에 불과했다. 미국 정치 판에서 ‘보수파’라는 단어는 대공황 때 민주당이 공화당을 공격하기 위해 만든 말이다. 후버 대통령은 ‘보수파’로 낙인찍히는 것을 두려워 해 스스로를 ‘진정한 리버럴’이라고 불렀다.
1952년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 미국 보수주의는 뚜렷한 퇴조를 보이고 있었다. 경제적 자유 방임주의와 정치적 고립주의가 대공황과 제2차 대전으로 모두 무너졌기 때문이다. 공화당은 현 부시 대통령의 할아버지인 프레스콧 부시 등 ‘온건 진보주의자’의 손에 장악돼 있었고 아이젠하워는 리버럴로 소문난 얼 워렌을 연방 대법관으로 지명했다.
60년대 들어 미국 리버럴리즘은 절정에 달했으며 케네디 대통령은 자신이 런던에서 마르크스 주의자인 해럴드 라스키 밑에서 공부했음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위대한 사회’ 등 복지 프로그램이 만들어지고 어퍼머티브 액션 등 소수계 우대 정책이 시행됐으며 사형제 폐지와 낙태 찬성 움직임이 인 것도 이 때다. 1964년 골수 보수파인 배리 골드워터가 린든 존슨에게 사상 두 번째로 큰 표 차로 패배하자 보수주의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듯 보였다.
그러나 골드워터의 참패는 역설적으로 이론과 열정으로 무장된 보수 이념이 일어나는 계기가 됐다. 영국의 에드먼드 버크를 필두로 한 보수주의 철학은 대체로 국가 권력에 대한 회의, 평등에 대한 자유의 우위, 애국심, 위계 질서 존중, 진보에 대한 회의, 엘리트주의로 요약된다. 미국 보수주의 특징은 처음 세 가지에 대해서는 적극 찬성이지만 나머지 세 가지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라는 데 있다. 미국 보수파들은 주어진 사회적 지위에 안주하기보다는 이를 향상하려 하며 발전에 대한 강한 믿음을 갖고 있고 대중주의적이다.
빈사 상태에 빠졌던 보수주의의 부활은 일련의 사상가들과 이들의 이념을 구체적인 정책으로 발전시킬 수 있도록 자금을 대 싱크 탱크를 설립한 자본가들, 이를 대중에 전달하는 역할을 맡은 보수 언론, 민주당의 좌경화 성향에 식상해 공화당으로 선회한 남부 백인 남성, 기독교도들, 총기협회 등 각종 이익 단체의 합작품이다.
우파의 사상적 대부의 하나로 꼽히는 앨버트 제이 녹, 성경 다음으로 많은 미국인을 움직인 책을 쓴 개인주의자 아인 랜드, 남부 전통의 우월성을 강조한 리처드 위버, 전통적 보수주의의 미국화를 시도한 러셀 커크 등이 미국 보수주의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다. 거기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루드비히 폰 미제스 등 오스트리아 학파와 밀튼 프리드만 등 시카고 학파가 시장 우월주의를 내세워 케인즈 등 경제적 리버럴리즘을 뒤엎었다.
윌리엄 버클리는 지금도 보수 평론의 대명사로 불리는 ‘내셔널 리뷰’를 창간, 이들 사상을 전파하는데 앞장섰으며 ‘네오콘’의 대부 어빙 크리스톨은 ‘공공의 이익’(Public Interest)과 ‘국가의 이익’(National Interest)을 통해 반공과 미국 제일주의를 기조로 한 공격적 외교를 주창했다. 그의 아들 빌 크리스톨은 부시 행정부내 네오콘의 입장을 대변하는 ‘위클리 스탠더드’를 발간, 뒤를 잇고 있다. 네오콘 인사들의 상당수가 젊었을 때 마르크스주의자였다는 점은 흥미롭다.
보수 이념이 사상 전쟁에서 확고한 승리를 거둘 수 있도록 기여한 인물로 싱크 탱크 설립을 주도한 다섯 명의 부호를 빼놓을 수 없다. 멜론 가의 재벌 리처드 멜론 스카이프와 쿠어즈 맥주 회사 주인인 보수 싱크 탱크의 상징인 헤리티지 재단 설립 기금을 내놓았으며 석유 재벌 카치 일가는 고전적인 자유주의 싱크 탱크 케이토 연구소를 창설했다. 브래들리 재단은 ‘내셔널 리뷰’를 지원했고 존 올린 재단은 ‘공공의 이익’을 도왔다.
이들이 보수주의의 머리라면 보수 정치 행동협회(CPAC), 전국 총기 협회(NRA), ‘세제 개혁을 위한 미국인’(ATR) 등 수많은 압력 단체들은 보수주의가 힘을 쓰는 데 필요한 근육 역할을 하고 있다. 거기다 미 대학의 리버럴 성향을 견제하기 위해 패트릭 헨리 대학 등 보수 이념을 가르치기 위한 교육 기관 설립도 줄을 잇고 있다.
미 현대 정치사에서 이런 보수주의의 흐름을 대표하는 인물은 레이건이다. 1964년 골드워터 캠페인을 도우며 전당대회장에서 기조연설을 해 전국적인 조명을 받은 그는 16년 만에 백악관을 탈환, 보수파의 꿈을 실현했다. 그 후 깅그리치 혁명과 현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재집권을 겪으면서 미국 사회의 보수화는 한층 뚜렷해지고 있다. 레이건 이후 7번의 대선에서 민주당의 좌파 성향 탈출에 앞장선 클린턴을 제외하고는 한 명도 민주당의 승리를 이끌어내지 못한 것만 봐도 이를 알 수 있다.
이 책 저자들은 보수 이념이 이처럼 미국 사회에 깊숙이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것은 사상가와 운동가의 노력 탓도 있지만 자유와 개인주의, ‘언덕 위의 도시’로 요약되는 이상주의와 낙관주의 등 미국의 건국이념이 근본적으로 보수주의에 맞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미국 독립 전쟁도 새로운 사회 건설을 꿈꿨던 프랑스 혁명과는 달리 ‘영국인들로서 타고난 권리를 돌려달라’는 보수적인 성격이 강했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어떤 나라보다 보수파가 득세하고 있는 미국이 유럽과 세계 각 국의 비판을 받고 있지만 보수주의의 뿌리가 워낙 깊고 넓게 퍼져 당분간 미국 내 보수 우위의 기조는 흔들리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 미국의 우경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읽어야 할 책 중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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