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룸댄스에서는 남성이 리드하고 여성은 그 리드에 맞추어 춤을 춘다. 물론 남성이 리드할 때 제멋대로 해서는 안 된다. 올바른 자세와 바른 스텝으로 리듬이 맞아야 하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음악을 탈 수 있어야 한다.
볼룸댄스를 배우는 부부들은 상당한 수준이 되고서도 다투는 경우가 있는데, 우리 부부의 경우, 아내는 나의 박자가 틀렸다는 것이고, 나는 아내가 남편의 리드를 따라오지 않는다는 불평을 한다. 둘 다 맞는 이야기다. 틀린 박자를 어찌 따르느냐는 것도 일리가 있고, 비록 틀렸더라도 댄스는 남자의 리드에 여자가 맞추어주어야 한다는 나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 한번은 지도 강사에게 물어보았다. 막상 댄스시범을 할 때 남편의 틀린 박자를 따라야 할 것인가 아닌가? 그는 따라야 한다고 했다.
이번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잘못된 전쟁’ 논쟁은 볼룸댄스의 박자 맞추기 상황을 연상케 했다. 잘잘못은 젖혀놓고라도, 전쟁을 마무리도 하기 전에 온 세계에 내놓고 ‘잘못된 전쟁’이라는 말을 함부로 쓸 수가 없는 딜레마를 나는 절감했다. 생명을 바친 젊은 영령과 그들 가족에게 무어라 말할 것인가? 케리의 ‘잘못된 전쟁’ 논쟁은 한국의 ‘과거사 논쟁’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케리가 과거 평가는 미래에 맡기고 자신은 이 전쟁을 종결짓는 현재를 맡겠다고 했더라면 책임 있는 지도자의 이미지를 부각시켰을 것 같다.
어쨌든 유권자들은 부시를 선택했다. 수만의 젊은이들의 생명을 담보로 한 전쟁수행 도중에 그 전쟁의 잘잘못을 따지는 경박한 사람에게 전군의 통수권을 맡길 수는 없다는 국민들의 의도가 반영된 결과라고 본다.
이번 미국 선거를 한국 선거와 비교해 볼만한 점들이 있다. 케리와 노무현 대통령은 토론 잘하고, 대중에 쉽게 어필되고, 유창한 언변은 물론이고, 선동적이며 경박한 공통점을 갖고 있다. 연수입이 20만달러 이상 되는 극소수(2%) 가정에게만 세금을 올린다는 케리의 발상이나, 노 정권의 평준화 지향은 모두 좌파적인 냄새를 풍기는 공통점도 있었다.
동성결혼과 같은 민감한 이슈에는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말재주로 무난히 넘기는 토론술을 케리는 발휘했고, 노 대통령도 장인의 좌익 가담에 대해서 “그럼 이제 내가 이혼이라도 해야하는가?”로 넘겨 버리는 재치를 보여주었다.
이런 공통점을 유권자들은 어떻게 처리했는가? 한국에서는 선동적이고 토론 잘하는 후보와 그의 당을 밀어주었지만, 미국에선 정반대였다. 미국 유권자들과 한국 유권자들의 다른 성향을 보여주는 선거였다.
민주주의의 많은 특징 중에 하나가 다수 가결이다. 한마디로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하자는 것인데, 문제는 다수가 원하는 것이 최선은 아닌 경우도 많다는 점이다. 이런 현실은 한 나라의 대통령을 뽑는데도 어김없이 적용된다.
유권자들의 선택은 국가의 미래상, 지도자의 가치관, 정책 선호도에는 물론, 선동에도 쉽게 영향을 받는다. 선거도 인간사인지라, 당락을 결정하는 요인 중에 선동과 집단심리를 무시할 수 없다.
중요한 교훈은 선동과 비방은 선거시의 다반사이지만, 어디서나 그 나라 국민수준에 준하는 지도자가 당선되게 마련이란 점이다. 일단 다수가결로 결정된 지도자의 행동에도 미국과 한국은 대단한 차이가 있다. 미국에서는 민의에 반한 ‘소신’ 정책수행이 어렵다. 2년 후 중간선거에서 다시 민의를 재확인해야 하는 부담도 있다. 그래서 대권을 잡고도 민의에 박자 맞추어 춤을 추는데 비해서, 한국에서는 일단 정권을 잡으면 민의와는 관계없이 소신껏 일하는 경향이 짙다. 미국의 다수가결 원칙은 항상 적용되지만, 한국에서는 선거 시에만 적용되는 것 같다. 민의를 따른다는 것은 선거 때나 당선 후나 일관적이어야 명실공히 ‘민주’가 될 수 있다.
정균희/UCLA 정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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