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국대전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세조가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추진한 조선의 근본 법전이다. 이 법전이 제정된 지 500여 년이 지난 후 한국의 수도를 정하는 기준으로 쓰여질지 세조는 꿈조차 꾸지 못했으리라.
한국의 헌법 재판소는 경국대전을 원용하고 관습헌법을 거론하며 압도적인 표 차로 국회를 통과한 행정수도 이전법을 백지화시켰다. 이번 결정이 나자 불과 몇 달 전 이 법안에 자기 손으로 찬성표를 던졌던 한나라당 의원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하고 있다. 참으로 노무현 대통령이 열린 우리당을 지지한다는 것이 탄핵 사유가 된다고 우긴 정당다운 모습이다.
역시 몇 달 전 헌재가 국회가 통과시킨 탄핵 결의안을 뒤집자 “구국의 결단을 내린 용기 있는 판사들”이라고 추켜세우던 열린 우리당 의원들은 이제 와서 자신들에게 불리한 판결을 했다고 헌법 재판소 판사들을 탄핵해야 한다고 으르렁대고 있다. 정신 질환의 정도가 한나라당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한 나라의 수도를 정하는 일은 나라의 국운을 좌우할 만큼 중요한 일이다. 최소한 몇 년 간의 검토와 여론 수렴 작업 후 국민적 합의 하에 이뤄져야 한다. 그럼에도 노 대통령과 열린 우리당은 충청 표에 눈이 먼 국회의원들이 넋이 나간 사이 국민 60%가 반대하는 수도 이전을 강행하려 했다. 설사 국민의 60%가 찬성한다 하더라도 40%가 반대하는 수도 이전은 서둘러서는 안된다는 것이 상식이다.
이번 헌재의 결정은 날치기 수도 이전을 막았다는 점에서는 잘 된 일이지만 노 대통령을 포함 많은 헌법학자들이 금시 초문인 불문 헌법론을 둘러댔다는 점에서 중대한 결함을 안고 있다. 불문 헌법이란 글자 그대로 글로 적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판사가 자의적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 영국과 같이 오랜 세월 관행이 쌓여온 나라에서는 무엇이 관습 헌법이냐는 데 대한 의견 합치가 이뤄져 있지만 한국과 같이 민주주의 역사가 짧은 나라에서는 판사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얼마든지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 수도 이전을 둘러싼 논쟁의 핵심은 그처럼 중대한 사안을 대통령이 국민의 뜻을 묻지 않고 강행하려 했다는 점인데 9명의 헌법 재판관 중 이를 지적한 사람은 단 한 명뿐이다.
이번 행정 수도 이전 소동으로 한국은 국가의 안위가 걸린 중차대한 사안을 사려 없이 추진했다 어느 날 갑자기 뒤집는 정신 분열적 나라임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관련자 누구도 자신의 처신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앞으로 이런 일이 재발되지 않으리라는 아무런 보장이 없다.
명분 없이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민주당을 박차고 나와 딴 집 살림을 차렸다 한나라당의 자폭으로 의회 과반수라는 횡재를 한 후 자기가 잘나 그렇게 된 줄 알고 있는 열린 우리당과 여기저기 눈치 보기에만 여념이 없는 얼뜨기 한나라당이 90%를 점하고 있는 곳이 한국 국회다. 이들을 지도자로 모실 필요가 없는 미국에서 살고 있다는데 감사한다.
<민경훈 논설위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