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붕괴 후 자유시장 체제는 하나의 ‘금도’가 됐다. 자유시장 경제에 반기를 들면 시대착오적이란 핀잔을 듣기 십상이다. 자유시장은 장점이 단점보다 훨씬 많은 체제로 평가된다. 그런데 이 통념에 일침을 가한 저작이 나왔다. 예일대 법대 에이미 추아 교수가 쓴 ‘World on Fire: How Exporting Free Market Democracy Breeds Ethnic Hatred and Global Instability’(2004)가 그것이다.
<박봉현 편집위원>
자유시장·민주주의가 인종갈등 촉발
LA폭동 - 뉴욕테러도 ‘증오 뇌관’ 터진 것
부유층, 부유한 나라의 ‘나눔 선행’이 최선책
1994년 9월 12일 오후 8시 필리핀 마닐라. 58세 중국계 미혼여성이 자택 거실에서 도살용 칼로 살해됐다. 용의자는 자가용 운전사이며 하녀가 범행 전에 칼을 날카롭게 갈았다. 그런데 경찰은 이들을 석방 한 뒤 사건을 종결했다. 피살자는 돈 많은 중국계이며 운전사와 하녀, 경찰은 모두 필리핀 사람이다. 피살자의 조카딸인 저자는 자신의 고모가 당한 끔찍한 사건으로 이 책의 논제를 풀어가고 있다.
필리핀에는 중국계가 인구의 1%밖에 안되지만 민간경제의 60%를 지배한다. 8,000만 필리핀 주민 가운데 약 3분의 2는 하루 평균 2달러도 안 되는 돈으로 살아간다. 산업 전반에 중국계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중국계의 산업에만 투자한다. 시장 개방 이후 이러한 현상은 더욱 심화됐다.
1990년 초 세르비아 군인들이 인종청소 차원에서 코소보 난민들을 학살하고 온갖 고문을 자행했다. 1994년 아프리카 르완다에서는 평범한 후투족 주민들이 3개월만에 투치족 주민 수십만 명을 죽였다. 1998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는 성난 폭도들이 중국계를 죽이고 그들이 운영하는 상점들을 불살랐다. 시장자율화 조치가 부유한 중국계에게 유리한 정책으로 전환되면서 다수 주민들의 반 중국계 정서에 불을 질렀다. 2001년 9월 11일 중동 테러범들이 여객기를 납치해 뉴욕의 월드드레이드 센터를 공격했다. 도대체 이러한 폭력의 뿌리는 어디에 있는가. 자유시장, 민주주의, 인종 증오의 세 가지 요인의 갈등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가설이다.
저자는 인종폭력이 비극이지만 가해자도 피해자도 책임이 없고 그 책임이 자유시장체제에 있다는 함축적 의미를 던진다. 시장을 지배하는 소수는 자유시장과 민주주의의 ‘아킬레스건’이며 인종적 민족주의에 불을 지르는 ‘엔진’이라고 규정한다. 자유시장경제와 민주주의가 개발도상국가들에 스며들면 경제권을 장악한 소수가 부를 축적하고 정치 파워까지 휘어잡으면서 소외된 다수의 분노를 자아내 비극적인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시장경제가 민주화와 손잡고 저개발국가들의 경제발전을 돕는다는 전통적인 가설을 저자는 통렬히 비난한다. 자유시장 전파는 항상 민주화를 동반한다. 자유시장경제는 부유층을 더욱 부유하게 만드는 데 반해 민주화는 가난한 다수의 정치적 영향력을 증대시키고 이를 기반으로 한 선동적 정치인을 등장시킨다. 이들 정치인은 민중의 지지를 기반으로 인종적 갈등을 조장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힘을 키워나간다. 동반자인 자유시장과 민주화가 낳은 비극의 씨앗이다.
저자는 필리핀의 중국계, 케냐의 아시아계, 시에라리온의 레바논계, 유고슬라비아의 크로아티아계, 라틴 아메리카의 백인, 동아프리카의 인도인, 러시아의 유대인 등을 실례로 들었다. 이들은 자유시장 체제에 편승해 부를 거머쥔 소수계다. 그리고 이들은 소외된 대다수 국민들로부터 증오의 대상이 돼 버린다. 특히 이러한 민심은 인종주의에 기초한 민족주의적 성향의 정권을 탄생시켜 보복과 탄압의 정치를 잉태한다.
이 글은 자유시장, 민주화 바람이 세 가지 역풍을 맞는다고 지적한다. 우선 ‘반 시장 역풍’이 있다. 짐바브웨 주민들이 외국인들의 국내 땅 장악을 성토하고 나선 일이 좋은 예다. 둘째 ‘반 민주주의 역풍’이 있다. 마르코스 전 필리핀 대통령이 부유한 소수를 감싸안고 정치적으로 특혜를 준 것에 대한 민중의 저항이다. 셋째 다수의 민중이 자행하는 폭력이다. 전 유고슬라비아에서 크로아티아인에 의한 알바니아인 인종청소와 르완다 후투족에 의한 투치족 인종청소가 그것이다.
저자는 LA폭동으로 한인들이 피해를 입은 것도 같은 맥락에서 언급한다. LA와 뉴욕 등지의 흑인 밀집지역에서 한인 상인들이 경제권, 특히 흑인 고유 비즈니스들을 장악하고 있는 것에 대해 가난한 흑인들이 분개했고 한인과 무관한 사건으로 비화된 LA폭동 때 한인비즈니스를 대거 불태우는 폭력행위를 자행했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인종증오의 악순환에 미국에 대한 테러도 연결시킨다. 한 나라 내에서는 인종간 갈등이 증폭하지만 나라와 나라 사이에서는 자유시장체제로 더욱 부를 쌓은 일부 국가들, 특히 미국에 대한 증오와 반감이 상승한다는 논리다.
저자는 인종갈등이 수면위로 표출되지 않도록 안전장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첫째, 자유시장과 민주화가 과도하게 적용됐을 때 발생하는 문제점을 제한하기 위한 규정을 고안하고 기관을 설립해야 한다. 둘째, 부를 분배하는 것이다. 셋째, 민주주의는 비서구 사회에서는 현실성을 결여하므로 짧은 시간에 이식시키려 해서는 안 된다. 넷째, 시장지배계층이 솔선 수범해 인종갈등을 줄여야 한다.
저자는 결론적으로 부유한 지배계층이 가난한 다수에게 베풀어 그들의 질시와 분노를 누그러뜨리는 게 최선이라고 한다. 미국이 다른 나라들에게 많은 것을 베풀면 미국을 향한 분노가 줄어들고 테러 위협도 감소할 것이라고 처방한다.
이 글은 부의 불균등 분배와 인종갈등의 화살을 자유시장체제에 돌리고 있지만 무능한 정부관료조직, 뿌리 깊은 부정부패, 열악한 사회기간 산업, 저급한 교육수준 등 특정 국가가 안고 있는 고질적인 질환과 인종갈등의 연계성에 대해서는 천착하지 않았다. 또한 일부 국가들에서 일어난 인종갈등이 설령 자유시장 체제 탓이라고 하더라도 이를 보편적인 이론으로 단정하기엔 무리가 있어 보인다. 게다가 이 글에서 예시된 갈등 사례들은 자유시장 체제 도입 이전부터 존재해 왔으며 앞으로 경제체제와 관계없이 재발할 수 있는 사안임을 간과했다.
하지만 이러한 약점에도 불구하고 인종갈등과 자유시장 체제와의 관련성을 보다 심도 있고 체계적으로 연구할 필요성을 일깨웠다는 점에서 점수를 줄 수 있다. 인종적 분규 양상을 띠는 테러로 흉흉한 세상이라 더욱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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