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모국 방문 시 심야 토크쇼에서 정치인, 시민단체 대표들이 나와서 과거사 정리·청산의 당위성에 대한 갑론을박을 하는 장면을 시청한 기억이 있다. 그 프로그램을 보면서 느낀 점은 아닌 것을 그렇다고 할 때는 당연히 말이 많아진다는 점과 과거 정리·청산보다는 과거 집착이 더 적확한 표현이 될 것 같다는 것이었다.
‘과거 청산’의 과거가 누구의 과거인가라는 질문을 던져 보고 싶었는데, 이야기 맥락으로 볼 때 ‘나’ 자신의 과거가 아닌 ‘남’의 과거인 것 같았다. 또 먼 과거와 가까운 과거 중에는 먼 과거를 택하는 것 같았다.
과거 청산은 개인적으로는 나의 과거를 청산해서 개과천선하여 새 사람이 되는데 의미가 있고, 집단적인 과거청산은 일본이나 독일처럼 전쟁을 일으켜서 주변 국가와 온 세계에 고통을 준 가해자가 속죄의 의미로 할 일이다. 한국처럼 피해자가 거국적으로 과거 청산을 한다니 그것도 50년 내지는 80년 전의 과거를 정리하고 청산한다니 온 세계의 웃음거리가 될 수밖에 없다.
기왕에 과거를 돌아보려면 극심한 빈곤국에서 세계 경제 대열에 나설 수 있게 된 단기간의 경제개발 과정을 구체적으로 연구분석 규명해서 경제 재도약을 꿈꾸는 건설적인 과거규명을 주문해 보고 싶지만, 참석자의 논쟁은 불행했던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남의 과거를 정리·규명할 때는 남을 곤경에 빠뜨리고 자신은 정당화 해보고자 하는 속셈이 있을 것이고, 불행한 과거를 들추어낼 때는 당연히 곤경에 빠진 사람을 해칠 수 있는 대중의 증오라는 무기를 만들자는 의도가 있을 것이다. 공산당의 인민재판과 숙청의 도구로써 이용한 친일파 제거는 바로 이런 점에 초점을 맞추었었다.
또 당당하게 따진다. “그럼 과거를 무작정 덮어두자는 말이냐?”-과거가 무슨 보물단지도, 쓰레기 더미도 아닌 바에야 덮어두고, 열어보고, 할 성질의 것이 되지 못한다. “그냥 덮어두자는 것은 아니지만…, 동기와 순수성에…” 하며 우물쭈물 하는 사이에 탁상공론에 휘말린다. ‘그런 것을 그렇다고 말할 때’는 당연히 말이 짧아야 한다.
“과거사는 당연히 과거 속에 묻혀 있어야 한다”를 나는 제언한다. 과거 속에서 묻혀 썩어서 분해되어 미래를 위한 비료가 될 때까지 묻혀 있어야 한다. 과거사가 올바른 역사적인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과거사를 규명·평가하고 파서 열을 올리는 무리들조차도 진정한 과거 속에 묻혀야만 객관적인 평가가 가능하다.
그래도 과거를 잊을 수가 없으면, 친일문제는 다시는 일본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부강해짐으로 해서, 민족상쟁의 과거사는 자유민주주의를 더욱 발전시킴으로써 청산할 기초가 생긴다.
미국에서는 처참했던 남북전쟁을 치르고도 과거 정리·청산 책임추궁의 욕망에 집착하지 않았다. 남부에 가혹한 세금을 물리고 책임을 묻자는 일부의 과거 집착적 주장을 누르고, 오히려 남부를 재건하는 방향으로 나라를 이끌어 갔다. 불행했던 과거는 증오를 유산으로 남기고, 불행했던 과거사를 파헤치면 증오의 열매가 자라게 마련인지라, 미래 지향적인 남부 재건으로 과거를 정리한 역사 속에서 링컨의 위대성을 배울 수 있다.
과거 집착의 ‘노예’가 되면 ‘배신자, 반민족 행위자’를 찾아내는데 혈안이 되고 특정인의 반민족행위 여부를 왈가왈부하게 된다. 실은 이런 식의 비생산적인 탁상공론이 바로 조선왕조를 망하게 한 주원인이었다. 국가가 망하고 나면 또 다시 반민족 행위자가 양산될 것은 불을 보듯 하다.
이제는 과거사 논쟁과 탁상공론 자체가 현재의 반민족 행위가 됨을 알아야 한다. 지금 왈가왈부하는 과거 정리·규명은 법적 현실적 책임을 묻기에는 너무 늦었고 역사적 정리를 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옳건 그르건, 원하건 원치 않건 간에 그 과거 위에 현재가 있음을 인식하여 과거를 수용하면, 그 위에 미래를 건설하는 ‘자유인’이 될 수 있다.
정균희/UCLA 정신과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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