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내무반의 일병, 병장, 신병 셋이 일렬횡대로 섰다. 신병이 휴가를 가는 일병에게 “휴가 잘 다녀오십시오”하고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자 가운데 있던 병장이 “꺼지라는 거야? 그런 거야?” 한다. 이번엔 병장이 일병에게 “야, 휴가가지 말고 나하고 부대에서 같이 지내자.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잖아” 하자 일병 왈, “호모야? 그런 거야?”하고 받아친다.
한국의 TV방송 코미디 프로그램 ‘웃찾사’(웃음을 찾는 사람들) 중 ‘그런 거야’라는 코너다. 영상 없는 글로서는 폭소를 끌어내지 못하지만 이들의 개그는 지금 화제다. 단순한 말장난이라고 우습게 여길 수도 있지만 귀에 거슬리지 않는 평범한 표현이라 남녀노소 누가 사용해도 거부감을 주지 않는다.
‘그런 거야’는 ‘웃찾사’의 다른 코너에서도 개그맨들이 간혹 심심풀이로 원용한다. ‘그런 거야’ 멤버들은 세 명 모두 개그계의 신참이다. 그런데 다른 코너를 진행하는 고참들이 사용할 정도로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프로페셔널의 세계에서는 좀체 보기 힘든 현상이다.
자신의 영역에서 한 가닥 한다는 사람들은 동료에 대한 평가가 짜다. 칭찬보다는 깎아 내리기가 다반사다. 더구나 경험이 일천한 신출내기에게는 눈을 내리깐다. 실력이 없으면 물을 흐린다느니, 실력이 좋으면 건방지다느니, 상대를 끌어내려야 자신이 올라간다는 ‘제로 섬 게임’이 지배한다.
‘그런 거야’ 개그가 일품이라는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막 발을 들여놓은 새까만 후배들의 개그를 자신들의 개그에 반영하는 선배들의 푸근함을 말하려는 것이다. 진정한 프로페셔널은 상대의 장점과 실력을 인정한다. 상대를 인정하는 게 자신을 초라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오히려 여유 있는 프로페셔널로 비추어준다. 상대의 인정은 곧 자신에 대한 정당한 인정으로 이어진다.
부시와 케리의 대선 1차 TV토론회는 케리의 판정승으로 끝났다. 갤럽(53 대 37), CBS(44 대 26), ABC(45 대 36), CNN-USA투데이(53 대 37), MSNBC(61 대 39). 언변이 뛰어난 케리가 우세할 것이란 전망이 있긴 했지만 유머감각이 탁월한 부시를 만만히 볼일은 아니었는데 결과는 예상치를 크게 웃돌았다. 토론에 참석한 부시는 평소의 그가 아니었다.
부시 진영은 애써 태연한 척하지만 앞으로 남은 두 번의 토론회에서도 비슷한 양상을 보이면 탁 트여 보였던 재선가도가 안개 속에 갇힐 수도 있다. 토론회 후 논객들이 여러 가지를 지적했지만 한 가지를 더해본다. 부시가 토론회 내내 17번 케리를 지칭한 ‘상대’(opponent)란 단어다. 이는 남을 비하하는 표현이 아니라 경쟁자, 적수를 칭하는 보통 단어다. 당연히 케리도 이에 불편한 기색이 없었다.
문제는 이 단어가 부시 자신에게 미친 영향이다. 이 단어는 경쟁자의 존재를 부각시켜 토론회가 제로 섬 게임의 현장임을 드러냈다. 대권싸움 현장이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러나 케리는 이 단어를 한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부시를 칭할 때는 꼬박꼬박 ‘대통령’이라고 했다. 부시의 입에서 ‘opponent’라는 말이 나올 때 굳어진 것은 케리의 표정이 아니라 바로 부시의 얼굴이었다. 평소 장기인 유머는 온데 간데 없었다.
지지자들로 둘러 쌓이는 길거리 유세에서는 ‘opponent’ 단어를 써도 무방하다. 하지만 지지자, 반대자, 중립자 모두가 주시하는 TV토론회는 다르다. ‘opponent’라고 할 게 아니라 ‘senator’(상원의원)라고 했으면 부시가 제 실력을 발휘했을 지 모른다는 느낌이다. ‘상원의원’이란 칭호로 경직된 분위기를 녹이면서 부드럽게 할말을 다할 수 있었을 것이다.
부시는 세상을 어수선하게 한 정치인이 아니라 신념 있는 정치가로 기록되길 바랄 것이다. 정치가가 되려면 경쟁자의 경력과 능력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포용력을 지녀야 한다. 케리가 아무리 보기 싫다고 해도 그를 ‘상원의원’으로 불러주는 게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부시는 알아야 한다.
‘상원의원’이나 ‘대통령’은 무슨 대단한 존칭도 아니다. 두 후보의 직책일 뿐이고 부시는 케리에 비해 대통령직을 먼저 맛본 선배다. 두 번 남은 토론회에서도 ‘opponent’를 밥먹듯 반복하면 전의는 타오를지 모르지만 여유 있는 지도자 상을 보여주기는 어렵다. 재선도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박 봉 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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