량기백 <전 의회도서관 한국과장>
조선조에 와선 ‘가사’(歌詞) 또는 ‘별곡’(別曲)이란 말로 송강 정철(1536-1598)이 시조를 썼다한다. 그러다 고산 윤선도(1587-1671)가 비로소 시조란 말을 쓴 걸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조선 중엽까지 그도 요(謠), 신곡(新曲), 시가(詩歌), 시사(詩詞), 시여(詩餘), 영언(永言), 가곡(歌曲)이라 했다. 국시인 유학과 한학에 몰려 시조가 우리말 시로서 굳어지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다만 윤선도의 뒤를 이어 가람 이병기(1881-1968), 노산 이은상, 그리고 조운 등 이름 모른 몇 안 된 애국 문인으로 그 명맥이 오늘로 이어왔나 한다.
‘시조사’를 단행본으로 아직 본 일이 없다. 말할 것 없이 우리 일반문학사에 들어있음직하다. 한국학백과사전(2) ‘서지’(219쪽) 항목에 시조집이라 해 꼭 하나 실려 있는데 신명균 편으로 1936년 서울 삼문사 출판부에서 펴냈다 했다. 그리고 이 책에 시조작가 약전과 색인 및 ‘난어해설’이 있다 했다. 혹 이 ‘난어해설’에 우리 ‘시말’(시어)이 있나 궁금하다. ‘단심가’를 비롯 재래 우리 시조를 보면 중국시 모형에서 벗어나는 사상적 바탕이 있게도 보인다. 그러나 이 다 우리 스스로 ‘한시’(중국말 시)라 했고 우리말 시라 안 했다. 이 나라에 우리 말 시가 없음을 인정한 말일까.
‘상서’와 더불어 중국 ‘시경’(Odes)은 가장 어려운 경전이라 한다. 운(Rhyme)과 대구(Parallelism) 등 중국말(한자 하나하나)에 규범(Discipline)이 있어서다. 우리도 그들처럼 엄격한 규율로 제도화, 우리만의 말 문학장르로 5보조(Pentameters) 또는 7보조(Heptameters)로, 그리고 우리말 운(Rhyme)과 대구(Couplet, Distich, Parallelism)로, 그리고 Shakespeare와 Goethe가 했듯 사투리 등 순우리말을 방방곳곳에서 찾아 모아 ‘우리 시말’로 이 나라 ‘겨레시’를 이뤄 Art(학)의 경지로 올려놨으면 하나 바라기 어려울 것 같다. 순 우리말(Lexicon)만이 이른바 ‘국어’란 인식이 없어서 일까. 아니면 ‘국어’란 말, 이는 자주독립 국가의 ‘국’자를 딴 말임을, 그리고 지나간 왕조와 식민지 때 ‘국어’란 중국말(한어)이요 일본말이요 순우리말은 ‘조선어’라고만 한 그사이 사정을 미처 몰라서 일까.
내가 가진 우리말사전에는 나락(벼), 재(고개), 그리고 노들(들), 동쪽, 서쪽 등 순 우리말을 안 실었다. 거의 한문말 풀이다. 한문말 다음에 순 우리말 준 것이 바로 우리말사전일 것 같은데. 그러나 우리말은 예외로 취급했다. 우리도 영어처럼 순 우리말로 시와 시조로서 펼치면 우리 말 발달 할 것만 같다. 이를테면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고 우짖는다’를 “아사 밝았느냐 큰 닭 새끼 닭 우짖는다”로. 이 글 쓰면서 순 우리말 시에 대한 아쉬움이 있어 이렇게 옮겨봤다.
Shakespeare(William, 1564-1616)가 썼다는 ‘King Lear’ 와 ‘Romeo and Juliet’을 읽어보니 그는 한낱 굿놀이하는 사람(Bard, Minstrel) 이었으나 영어사투리를 모으고자 한(Denouement) 의식이 있었던 것 같다. ‘시학’에서 말한 것처럼 이는 그의 국가주의에서 나온 발상이었다. (참고로 Shakespeare작품, 17세기 백작 ‘Earl Edward de Vere’를 썼단 설이 있다). 그는 굿쟁이였기에 말 구사와 윤색(Poetic license)에 남다른 천분이 있어 이렇게 해 모은 영어사투리로 서양서 이미 오래 내려온 설화를 시 형식으로 윤색 희곡화했다. 이렇게 연극으로 공연한 건 영어 보급시키기 위한 한 방편이었다. 연극을 ‘굿’처럼 구경거리로만 아는 우리와는 달리 희곡의 사명, 이는 말과 시대사조 보급의 한 방법이요, 수단이요, 도구로 삼아 연극이란 수단으로 영어를 온 백성에게 퍼트렸다. 자기나라 말을 완성하려는 국가적 그리고 민족적 큰 뜻과 사명감이 있어서다. 그는 과연 영어의 어버이가 아닐 수 없다. 그때까지 영어에서 차지한 외국어인 불란서말을 자기나라 국어 곧, 영어화(Anglicize)하기 위한 뚜렷한 의식과 의도가 있어 그가 돌아다닌 것 같다.
이런 정신이 18세기에 와서 드디어 영국에선 ‘지성과 계몽운동’(Intellectualism, Enlightenment)을, 그리고 독일에서는 ‘낭만주의’(Romanticism)를 낳았고 그 속셈은 바로 그들 ‘Nationalization’의 결실이었다. 이렇게 그들 문예 정치와 더불어 지성운동의 횃불(Flambeau)이었다. 이런 의식이 없었던 방랑시인(Wonderlust) 김삿갓(1807-1863)과는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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