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오랜만에 LA에 사는 사촌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어릴 적 의사인 아버지로부터 귀염둥이로 사랑 받으며 자란 동생이었다. 원래 성악공부를 하려고 유학생으로 왔던 그녀는 결혼을 한 후 친정아버지가 고혈압으로 갑자기 돌아가시자 공부를 중단하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만 했다.
사촌부부는 이민초기의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훗날 이혼하였다는 소식이 나에게도 들려 왔었다. 그런데 고맙게도 사촌은 한국 사람이 운영하는 사무실에서 일을 하며 홀로 재기를 잘 하고 있었다. 오늘은 나와 오래 알고 지내 온 친구의 사무실에서 직원을 채용한다기에 응모를 하였으니 나의 입김을 좀 불어넣어 달라는 어려운 부탁을 하는 전화내용이었다. 수 년 동안 쌓은 경험으로 이젠 큰 사무실에서 배우며 전문인이 되고 싶다는 그녀의 포부였다.
지난날 언젠가도 응모를 하였는데 채용이 되지 않았다며 사촌이 매우 섭섭해하던 일들을 뒤늦게 내가 알게 된 일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용기를 내어 나와 친하게 지내온 사장님께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나의 기대와는 달리 사장님은 담당사무직원이 인터뷰를 해서 결정을 할 것이라며 나의 부탁을 교묘하게 회피하였다.
그 후 인터뷰는 안 사장 마나님이 혼자서 하였다며 사촌이 나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말해 주었다. 사실 그 사무실의 사장님은 바깥양반이시고 집사람은 자격증이 없지만 함께 일하는 직원이었다. 그런데 중요한 직원채용의 인터뷰를 아내에게만 맡기고 있다는 새로운 사실에 나는 놀라움을 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두 번째 응모를 하는 사촌은 그 사무실에 미련을 두고 있었다. 안 사장 마나님께 한 번 더 말해 보아달라는 사촌의 간곡한 부탁을 두 번째 받으며 나는 머리가 쑤시기 시작하였다. 작은 성안에 있는 두 임금님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일하는 그곳의 무거운 분위기가 걸려서 나는 도무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우람한 성 같은 사무실 안에서 오랫동안 여왕으로 군림해 온 그녀는 사실 늘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그래서 평범했던 그녀의 콧대는 한없이 하늘을 찌르는지도 모른다. “그래 아쉬운 쪽이 나 이니 내가 다시 전화를 걸란 말이지”라고 나는 속말로 중얼거려야만 하였다.
혼자 사는 사촌의 생계가 걸린 일이니 나는 또 한번 용기를 내어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나의 기대와는 다르게 안 사장도 역시 다른 이유를 들먹이며 나를 민망하게 하는 것이었다. 실력이 없이 막무가내로 하는 것도 아니고 그동안 쌓아 온 그녀의 경력과 함께 당당하게, 이왕이면 신원이 확실하니까 가능한 추천이었다고 믿었던 나의 한 가닥 희망이 또 다시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그녀와 대화를 마치고 수화기를 내려놓으니 언젠가 내가 잠시 일을 하였던 어느 사무실의 불쾌했던 분위기가 떠올랐다. 그곳에도 남편과 아내라는 두 임금님인 보스가 군림을 하고 있었다. 그곳의 사장님은 아예 공개적으로 안 사장을 사장보다 더 높은 회장님이라고 나에게 소개를 시켰고 그렇게 불러 달라고 당부도 하였다. 물론 그들은 직원들에게 우스개 소리처럼 부르는 것이라며 변명을 하였지만 실제로 사무실 안의 분위기는 계급사회의 군대처럼 삭막하였다.
농담 속에 진담이라던가. 대부분의 한인사회에서 이런 식으로 일을 해야 하는 사무실 분위기에 대한 언짢은 이야기들을 난 종종 들어 왔었다. 남편의 후광을 입고 남편의 직장에서 더 높은 계급으로 은근히 목소리를 높이는 안주인이기보다는 남편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보이지 않게 겸손한 마음으로 내조를 한다면 얼마나 금상첨화 속의 사무실 분위기이겠는가 말이다.
나는 이런저런 생각들로 마음이 울적해 있었는데 저녁때쯤 사촌이 더 나은 봉급으로 다른 사무실에 취직이 되었다며 기쁜 소식을 나에게 전해주었다. 다행스럽게도 사촌은 같은 날 두 곳의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했었다고 했다. 이제 염려를 놓으라는 그녀의 말에 나는 긴 안도의 한 숨을 쉬었다. 우리가 마음만 바르게 먹고 살아가노라면 전화위복도 일어나고 답답한 쥐구멍 같은 우리네 삶에도 종종 따스한 희망의 햇볕이 들어와 살아갈 수 있다며 사촌을 격려해 주었다.
최미자/ 샌디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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