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하다. 이상할 정도다. 주체사상인가 뭔가 하는 논리에 따르면 벌써 몇 번, 아니 수십 번 이상 성명서가 나왔어야 했다. 고구려사가 중국의 변방역사라니. 될 법한 이야기인가. 그런데도 아무 말이 없다. 중국의 고구려 역사 말살기도에 북한은 왜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을까.
“무정부 상태다. 무력집단끼리의 충돌위험이 고조되고 있다. 수령이 없는 수령 유일주의 체제. 대규모 봉기가 임박했다. 상황은 극히 유동적이다. 결국 우려하던 사태가 왔다. 중국 군의 진주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 사태를 방치할 것인가. 아니면….”
김일성 사망 후, 그러니까 8년 전인가, 9년 전인가. 그 무렵에 나온 갖가지 북한 붕괴 시나리오의 하나다. 결국 체제가 무너졌다. 뒤이은 혼미상황에서 중국 군이 북한에 진입할 때 미국은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하는 내용이다. 미국으로서는 물론 최악의 시나리오다.
그 시나리오의 배경은 이렇다. 중국은 북한에서 어떠한 제도상의 변화를 원치 않는다. 변화는 파워의 공백사태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의 사태가 벌어질 경우 중국 군 개입은 필연이다. 군사개입에는 아무 하자가 없다. 1961년에 체결된 조·중 우호조약은 치안유지나, 영토보전을 목적으로 한 중국 군의 북한 진주를 보장하고 있으니까.
잠깐 언론을 타는 듯했다. 이 시나리오는 그러나 곧 시야에서 사라졌다. 너무나도 터무니가 없는, 그야말로 ‘제멋대로의 시나리오’로 비쳐져서인가. 그 중국 군 개입설이 그런데 요즘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악의 축’ 북한, 북한 체제전복(regime change) 등의 말이 공공연히 나돌면서다. 결국은 체제전복으로 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북한 핵 문제와 관련해 워싱턴에서 줄곧 논의되어 온 사항이다. 이에 대해 중국은 이런 논리로 맞서왔다. 미군이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주둔하는 상황을 허용할 수 없다.
북한 체제전복의 아이디어는 그래서 원점을 맴돌아 왔다는 게 워싱턴과 베이징 외교가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다. 이 정황에서 튀어나온 게 중국의 고구려 역사 말살기도다.
무엇을 노리고 있는가. “동북 변경지역의 안정을 유지하고 발전을 촉진하기 위한 것이다.” 이른바 ‘동북공정’에 대한 중국 사회과학원의 설명이다. 애매 모호하게 들린다.
타임지의 풀이는 이렇다. 한반도 통일에 대비한 것이라는 거다. 200여만 조선족이 현재 살고 있는 간도지방은 사실에 있어 한국의 영토로, 훗날 통일한국이 4만3,000여 평방킬로미터에 이르는 이 지방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나서는 사태를 사전에 방지하려는 기도라는 것.
그 뿐일까. 다른 시각도 있다. 워싱턴의 일부 관측통들이 보이고 있는 견해로, 한 발 더 진전된 시나리오를 제시하고 있다. 중국의 고구려사 말살기도를 순망치한(脣亡齒寒·입술이 없어지면 이빨이 시리다)의 전통적 한반도 전략의 ‘새로운 버전’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고구려사가 중국 역사로 기정사실화 될 때 북한의 장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논리 전개의 출발점이다. 현재의 북한 땅은 거의 다가 옛 고구려 땅이다. 그러므로 고구려사가 중국 역사로 편입되고 이를 국제 사회가 인정할 때 북한은 중국 역사의 일부라는 논리도 성립될 수 있다.
이 점에 새삼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함께 중국 군의 북한 개입 가능이 조심스레 점쳐지고 있다. 말하자면 고구려사의 중국사 편입은 북한 체제가 붕괴돼 가는 어느 시점, 중국 군이 북한에 진입해 점령정책을 펴나가는데 따른 장기적 차원의 정치행위라는 지적이다.
조·중 우호조약은 유사시 중국 군의 북한 진입을 보장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중국 군의 북한 진주, 그리고 뒤이은 장기 점령을 위해서는 보다 확실한 명분축적이 필요하다. 고구려사 말살은 이 때를 대비한 것이라는 이야기다.
중국이 노리는 것은 북한지역을 입술, 다시 말해 완충지대로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합병이 불가능하면 북한 땅에 최소한 친중 정권이라도 세워야 한다. 그리고 군사적 후견자 역할을 맡아야 한다. 한국은 물론이고 일본을 군사적으로 견제하기 위해서다.
가능한 이야기인가. 설(說)은 어디까지나 설이다. 때문에 맞는다는 보장은 없다. 그렇지만 뭔가 불길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고구려의 정통성을 계승했다고 그토록 주장하던 북한이다. 그런데 말 한마디 못하고 있다.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기는 한국 정부도 마찬가지다. 거기다가 중국의 민족주의는 날로 고조되고 있다. 그 무력감이, 그 이상 열기가 무서움으로 전해져서다.
중국은 한국민에게 과연 무엇인가. 새삼 던져보는 질문이다.
옥 세 철<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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