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세까지 화필든 스페인의 천재화가, 1만6천점의 회화 남겨
피카소와 여자
피카소는 살아생전 7명의 여자와 살았다. 이 여성들은 ‘부인’이라기보다는 ‘연인’에 가깝다. 피카소는 아무리 매력 있는 여자라 해도 7, 8년 살고 나면 싫증을 느꼈다. 그의 그림은 연인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경지를 보였으며 피카소는 여성을 통해 얻는 이 영감을 굉장히 중요시했다. 정력이 너무 강해 여자를 바꾼 것만은 아니다. 한 여자와 오래 살면 작품에 생기가 없어져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는 자신의 예술세계가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을 우려했었다.
피카소의 그림은 대부분 섹스 아니면 죽음과 관련지어져 있다. 그는 새로운 여성을 사귀기 시작했을 때, 또는 참혹한 죽음을 보거나 주변에서 친구가 세상을 떠났을 때 굉장한 자극을 받았으며 이 자극을 그림으로 옮길 줄 아는 천재적인 소질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그림이 힘있고 색상이 강한 것은 그의 예술세계가 충동적인 정열을 배경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피카소 그림은 어떤 파에 속하지 않는다. 그는 젊었을 때 입체파로 불렸으나 그림에 따라 신고전파, 초현실파, 자연주의파, 표현주의파 기법을 택했기 때문에 변화무쌍한 것이 특징이고 굳이 규정짓는다면 ‘피카소파’‘현대파’라고 부르는 수밖에 없다. 그는 변화를 생명으로 삼았으며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찾아 헤맸다. 그의 예술세계에서 보면 화려한 여성 편력에 이해가 간다.
그러나 피카소도 여자 때문에 커다란 쇼크를 받은 적이 있다. 발레리나인 올가 코흐로바는 그의 3번째 여성이었는데 결혼식을 요란하게 올린 데다 아들까지 낳았기 때문에 헤어지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피카소는 이혼하면서 결국 그의 모든 그림과 저택을 그녀에게 빼앗겼다. 이때 받은 충격으로 1년 동안 화필을 놓았었으며 올가가 죽었을 때 장례식에 안 갔을 정도로 피카소는 이 여자에 대해 진절머리를 낸 모양이다. 그 후부터 여자가 임신하는 것을 그는 겁냈고 특히 위자료 청구로 인해 자신의 작품이 차압당하는 것에 노이로제가 걸렸다. 이같은 두려움은 ‘미노타우로마키’와 같은 그의 작품에 나타났을 정도다.
피카소에게 행복감을 안겨다준 여성은 7번째 연인인 재클린 로크(사진)였다. 그녀는 마리 테레즈처럼 섹시하지도 않았고 도라 마르처럼 지성적이지도 않았다. 아주머니 스타일의 평범한 여자였지만 어떤 여성보다 피카소에게 헌신적이었다. 그녀는 1973년 피카소가 92세로 숨질 때까지 20년간 그와 동거하는 신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피카소의 유산분배 과정에서 전처 자식들과 부딪쳐 크게 마음의 상처를 받았으며 “재클린이 피카소에게 헌신적이었던 것은 그의 유산을 차지하기 위해서였다”는 소문이 돌자 자살해 버렸다.
스페인을 관광하노라면 앨함브라 궁전 등이 있는 안달루시아 지방을 돌면서 ‘마나가’라는 아름다운 해변도시를 지나게 된다. 이 곳이 바로 피카소가 태어난 마을이다. 시의회가 그의 생가를 박물관으로 개축해 놓았으며 98년 개관식 때에는 스페인 왕과 왕비가 참석했을 정도의 명소인데 관광 가이드들이 시간을 핑계 대고 말라가에서 고성이나 성당 건물만 안내하는 경향이 있다. 말라가에서는 만사 제쳐놓고 피카소 박물관부터 봐두어야 한다. 그리고 마드리드에서는 프라도 박물관만 볼 것이 아니라 건너편에 있는 소피아 왕비 현대미술관에 가서 2층 별관에 전시되어 있는 피카소의 대형 회화 ‘게르니카’를 꼭 관람할 일이다. 거기까지 왔다가 ‘게르니카’를 안 보고 지나친다는 것은 곰을 잡은 후 쓸개를 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피카소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게르니카’(1937년작). 스페인을 전쟁터로 몰아 넣은 프랑코의 파시스트 정권에 항의해 그린 대작이다. 독일 전투기의 공격을 받고 죽어가는 게르니카 지역 주민들의 울부짖음과 고통, 비명등을 표현한 것이며 소와 말은 파시스트 및 독일군을 의미한다. 마드리드 소피아 왕비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아비뇽의 처녀들’(1916년작). 창녀들을 그린 것이다. ‘게르니카’와 함께 피카소를 상징하는 대작. 그의 입체주의 작품중 대표적인 것으로 꼽힌다.
‘우는 여인’(1937년작). 피카소의 5번째 연인인 도라마르다. 그녀는 피카소의 바람끼 때문에 자주 울었다고 한다.
‘여자 투우사의 죽음’(1933년작). 황소는 피카소, 누드 여성은 마리테레즈를 상징한다. 이 작품은 죽음과 섹스를 동시에 표현하고 있다.
마리테레즈의 초상(1937년작). 4번째 연인으로 가장 관능적이었다.
라 셀레스티나(1903년작). 창녀촌의 냉혹한 포주가 모델. 청색시대의 대표작.
마드리드 소피아 왕비 미술관내에 있는 피카소 기프트숍. 커피셋트에서부터 모자, 티셔츠, 핸드백에 이르기까지 기념품마다 피카소 그림이 새겨져 있다.
이철 주필 chullee@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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