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숨쉬며 살던 땅과, 함께 호흡하던 사랑하는 이들을 뒤에 남겨둔 채로, 비행기가 활주로를 빙돌던 그 시간까지도 조금이라도 더 보려고 한국 땅에 눈 맞추고 퉁퉁 부은 눈으로 꺽꺽대었던 그날… 동생이 내가 떠나기 일주일 전부터 날짜를 세어가면서 깨알같이 쓴 일기책을, 내 가방속에 살며시 넣어주어 비행기 안에서 웬만큼 진정하고 고요해진 시간에 읽으면서, 다시금 그리움과 그들에게 잘 해 주지 못한 회한이 물밀 듯 몰려와 다시 주체할 수 없는 울음이, 마치 사랑하는 이를 죽음으로 보내는 분리의 아픔을 경험하는 듯 오열했던 그 날… 아무 것도 모르는 것 같았던 마냥 개구진 다섯 살 난 아들 승리도 우리를 떠나보내는 이들을 보면서, 입술을 씰룩거리며 구슬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그 모습을 보면서 가슴 깊숙했던 그날의 아픔과 동시에 가졌던 희망을 기억한다. 이렇게 하여 15년 전에 내가 살던 땅을 뒤로 하고, 이민보따리 속에 지금과 내일에 속한 것만 차곡차곡 챙겨 넣고서, 아들하나 데리고 나선, 봄나들이가 아닌 젊은 엄마의 수수께끼같은 삶의 나들이를 낯설고 말설고 물설은 이 곳으로 멀리, 아주 멀리 날아왔다.
미국에 첫 발을 내 디디던 날, LA에서 샌프란시스코행 비행기를 갈아 탈 때 짐이 늦게 나오는 바람에, 숨이 턱에 차게 승무원 아가씨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데를 향해,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면서 한참을 있는 힘을 다해 뛰었다. 엄마를 따라 함께 뛰던 다섯 살짜리 승리가 얼마나 다리가 아팠을까?… 순간 오랜 시간 날아오면서 흘린 눈물이 자국만 남은 채 얼굴이 쬐이는 느낌과 함께 바싹 말라있었다. 마치 이제 시작이다라는 멧세지 라도 받은 듯이 정식이 버쩍 들었다. 들려오는 모든 영어소리가 대충이라도 알아듣기는커녕, 웅웅거리는 느낌으로만 다가왔고 그날 비행기에 올라 내려다 본 미국땅의 바둑판 같은 평야지대와 행글라이더의 아름다운 모습과, 낮게 뜬 비행기의 엔진 소리를 잊을 수가 없다. 지금도 그 소리가 나면 난 한참을 서서 고개를 쳐들고 바라본다. 그리고 웃는다. 이 곳에 처음 왔을 때, 낯선 길 어느 길을 들어서던지 앞마당과 뒷마당이 어울리게 정말 실용적으로 잘 지어져 있는 그림과도 같은 깨끗한 집들이, 주소번호를 가슴팍에 앞세우고 차례대로 줄지어 서 있는 정돈된 모습을 보면서, 마치 이 땅에 사는 방법을 말없이 가르쳐주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받기도 하였다. 반면에 나도 모르게 마음 속에 떠오르는 대조적인 모습이랄까도 싶은 한국의 전통가옥의 돌담과, 어떤 배치의 규정도 없이 적당히 놓여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우리들의 한옥집에 성큼 들어가 보고 싶었던 야릇한 충동… 마치 우리의 인생살이처럼 가다가 꺾이고 또 다시 이어지는 모습처럼, 한옥집의 이채저채가 생각나기도 했다. 막상 그곳에 살때엔… 있을 때 귀한 줄 모르는 인간의 멍청하고 멀리 보지 못하는 습성처럼… 그런 아름다움이 별것 아닌 냥 지나쳐 버렸었는데…
숲 속에 있을 땐 숲의 아름다움을 볼 수가 없다고 했던가! 지나가던 느낌과 감정이, 지금에서야 적어보자니 표현이 되는 것이지 처음 미국서 짐을 풀고 이 땅과 친해 보려고, 아니 친해져야만 했던 그 때엔 이런류의 느낌까지 토닥여가면서 씹어 가면서, 시간을 할애해줄 여유가 전혀 없이 살았다. 하루하루의 긴장과 걱정과 영어로 인해 숨고 싶었던 시간들로 미래의 꿈은커녕, 알게 모르게 주눅이 들어가고 있는 나를 수없이 모른 척 했다. 지금 되돌아보면 무척이나 용감했었다. 그 세상이 나 자신과의, 현실과의 전쟁터였다면 아직도 건재하게 살아있음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승전가를 불어야 하지 않을까? 카페에서 파트타임을 뛰면서 바닥이 종이장처럼 얇은 $1.99짜리 운동화를 신고, 걸어도 걸어도 줄어드는 것 같지 않았던 그 길을 걸어 열심히 우체국 시험 번호를 외우는 것이 한 자락의 희망이 되어 주었다. 일이 끝나고 Adult School에 앉아 있는 시간엔 왜 그리도 피곤하고 졸린지… 그냥 하늘이 뿌연 연기에 쌓인 것 마냥, 그냥 그냥 피곤했다. 버스에서 내려서 걸어오는 도중 길가에 문이 잠겨진 예쁜 교회당 앞마당에 털퍼덕 앉아, 신발 벗어서 땅을 두드리며 울다가 웃다가 주님과의 면담을 마치고 툭툭 털고 일어섰다. 집에 들어서면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 다 잊어버렸다. 다 잊어버릴 수 있었던 것이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길 어귀를 돌아 멀리서 뙤약볕에 작은 자전거를 타는 승리가 왔다갔다하는 것을 느낌으로 잡아내고 있을 때, 이 엄마를 알아보고 나를 부르며 달려오는 승리와의 만남이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뿌듯함을 주었고 내가 살아있음에 대한 명쾌한 해답처럼 여겨졌다. 만날 때마다 눈물이 핑 돌았다. 차를 사게 된 후로 그 감격적인 연출이 줄어든 것이 참으로 아쉬웠다. 한번은 내가 타야할 버스가 먼발치에 섰다. 옆 거울로 내가 기를 쓰고 뛰어오는 걸 본 운전사 아저씨가, 내가 도착할 때 까지 기다려 주었을때의 그 고마운 마음… 그러면서도 Take Your Time… 하면서 웃어주던 일… 그날 승리를 보자마자 그 얘기를 해 주면서 그 아저씨가 너무도 고마워 승리야… 손을 꼭 쥐었다. 너는 학교에서 열심히 하고 엄만 열심히 일할게…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몇 달 후에 우체국 시험을 보고 나오면서 세상 살아가는데 조금 자신이 생겼다. 남들에게는 웃기는 말이겠지만.
석 달 가량 흘렀을까? 우체국 인터뷰 통지를 받았으나 운전 경력이 없는 터라 내게 희망을 가져다 주던 서류를 되돌려 보내야만 했다. 허무하게 내 손에서 놓아야만 했을 때… 너무 빨리 불러 주어도 걱정인 것이구나 하면서, 아무리 소원이 하늘에 닿도록 급해도 적절한 때가 아니면 안 되는구나 생각하였다. 때에 충족되기 위한 자격을 채워두어야 기회가 적용되는 살아가는 순리 앞에 무릎을 꿇고 보내는 수밖에… 또 다시 잊어버리고 열심히 살았다. 사실 이곳에 올 때 미국 이민 생활에 대해 전혀 들어본 바도 없었다. 이렇듯 육체적인 노동으로 때우고 사는 것인지도 내가 몸소 살면서 알게 되었다. 이곳에 온지 2달후 승리를 프리스쿨을 지나 그 해 비용이 안 드는 Summer School에 넣으면서, 아침 5시반이면 나가는 엄마와 함께 일어나서 엄마가 먼저 나가고 TV 만화를 보고 기다리다가 시간이 되면 학교에 가곤했다. 한번은 내가 늦게 나가던 날 승리와 함께 학교에 갔다. 간식 봉지와 함께 승리를 Class에 넣고 돌아서 나오면서 반사적으로 휙 돌아다 보았더니, 승리 눈에 눈물이 고인 채로 나와 눈이 마주치자 벽쪽으로 돌아서는 걸 보고 내 발이 차마 떨어지질 않았다. 게다가 엄마따라 일찍 일어나다 보니 공부시간 쯤 되면 졸음이 퍼붓는 모양이었다. 학교도 한번쯤 가기 싫다고 할 수도 있을텐데도 그런 말을 하는 일이 없는 승리가, 돌아서는 엄마도 일하러 가는 거니까 따라 갈 수 없다는 현실을 알았던 모양이었다. 여름학교가 거의 끝날 쯤 성경반에 승리를 넣고 2달쯤 지났을까, 어느날 신기하게도 승리의 혀가 풀린 듯 하루종일을 영어로 이번엔 너무 말이 많다고 학교에서 지적을 받고, 너무 자기 주장이 많고 목소리가 크다고 늙은 선생님이 Bad Boy라고 한 때도 있었지만, 승리도 미국학교와 한국 유치원의 다른 점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무엇이든 규칙에 맞게 기다리면 차례가 온다는 것과, 자기를 괴롭히는 친구가 있을 땐 큰 목소리 혹은 주먹이 아니라 교장 선생님을 먼저 찾아가야 하는 것 등등… 할말이 있으면 소리 지르는 것이 아니고 찬찬히 순서 있게 말하는 것 등등… 그런 것들은 지금 생각해 보아도 참 좋은 교육이었다. 그렇게 승리는 적응을 하면서 밝게 꾸밈없이 잘 자랐다. 2년이 넘어가던 해 어차피 우체국도 3년의 운전기록이 필요했고 그것 바라보고 파트타임을 계속할 수도 없었다. 같은 고생하느니 개인 융자라도 얻어서 스몰 비즈니스를 해야겠다고 계획을 세우고, 5년만 꿀벌처럼 일해서 융자갚고 기반을 닦자고 각오를 하였다.
아는 사람을 통해 융자도 해결되었고, 큰 회사에 속한 프랜차이즈 가게를 시작하였다. 골동품으로 장식된 작은 Cafe를 사랑하면서 힘들었지만 정말로 열심히 일했다. 너무도 기적같은 나날이라고 생각하면서 다른 생각할 틈도 없이 그저 읽어보는 책이 Cook Book이었고, 무슨 음식이 궁금하면 식당에 가서 직접 사먹어 보면서 성분을 냅킨에 적어오기도 했다. 그렇게 시장보는 일이 힘들었다. 손님들과 친해지면서부터 하루가 그렇게 길게 느껴지지 않았고, 그저 잘 해주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나처럼 미국 음식도 모르는 여자가 해주는 음식을 맛있게 먹어 주는 것 하나 만으로도 기적이었고 손님이 고마웠다. 손님의 표정만 보아도 마음 속까지 보이는 듯한 초능력이 나도 모르게 생기는 것 같았다. 집에 돌아오면 승리의 산수문제를 60가지 다른 Type으로 쿠몬 종이를 본떠서 만들었다. 번갈아서 숙제를 내주고 제목을 정해서 글짓기를 하고 피아노 연습 등 하루도 어김없이 숙제를 해 놓은 승리가 고마웠다. 새벽부터 일하고 집에 돌아오면 얘기할 새도 없이 골아 떨어졌다. 이런 엄마의 모습을 보고 승리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때는 이런 생각도 못해보고, 어린 승리의 입장에서 엄마를 바라볼 여유조차 없이 사막처럼 살았던 것 같다. 틈틈이 승리의 야구공 던져주는 일도 해 주어야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린 승리가 하고 싶은 것이 얼마나 많았을까? 매 시즌마다 야구, 축구 트랙을 빠짐없이 쫓아다녔으나, 어릴 때 많이 보는 만큼 생각이 커지고 꿈이 생기는 것인데… 여행이라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으니 말이다. 지금도 나처럼 삶이라는 보이지 않는 끈에 묶여 살고 있는 이민자들이 얼마나 많을까? 제발 마음만은 사막이 아닌 푸른 숲을 유지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마음 같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카페를 10월말에 시작하였고 성탄 새해의 고비도 무난히 지나고 가게도 제접 살아나는 듯 하였다. 터키 샌드위치를 하루도 안 빠지고 사먹던 그래미 라는 미국남자의 밝은 얼굴은 지금도 선하다. 가게를 닫은 후면 가게를 돌아보면서 내가 어떻게 이런 가게의 주인이 되었을까? 5년은 내 인생을 여기에 투자했다고 생각하고 죽은 듯이 살아야지… 그리고는 내 속에 새 마음으로 채우곤 하였다. 계절의 문을 연다는 4월이 되어, 더욱 나무와 꽃들이 아름답고 카페 앞 뜰을 끼고 만들어진 호수엔, 오리가 새끼를 낳아 엄마 오리를 쫓아서 줄지어 노는 걸 즐겁게 바라보곤 하였다. 바빠서 깜빡 잊고 먹이를 안 준 날이면 카페 문앞에 오리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봄날 어느 새벽 5시50분… 여느 때와 같이 가게로 들어서는데 무언지 느낌이 이상했다. 웬말인가! 간밤에 빌딩 2층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아래층에 자리잡은 나의 예쁜 꿈의 공간이 숯검정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모습으로, 내 눈앞에 한치의 숨김도 없이 내 숨을 조이면서, 검은 빼대만 앙상히 남은 지붕을 쓰고 버티고 있었다. 입구조차 노란 줄로 쳐져 들어가 볼 수 조차 없는, 아니 들어가 볼 필요도 없이 속이 훤히 비치는 꼴이었다. 온통 마당엔 소방차의 널 부러진 호스와 소방대원들이 피곤에 지친 모습으로 여기저기 앉아 있었고, 빌딩 지붕 위에선 불꺼진 후 아직도 그 열기가 남아 있었다. 아! 이럴수가, 이런 일이 진행되고 있던 지난 밤에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하루 잘 지내게 해 주심에 대하여 승리와 함께 감사기도를 드리고 잠자리에 들었겠지, 눈물은 줄줄이 흘러 내렸지만, 울음소리는 전혀 바깥으로 새어나오지 않았다. 이런 경우를 보고 기가 찬다는 표현을 쓰는 것인가 보다. 하늘이 노랗다는 것은 느낌이 아니라 실제임을 그때 경험할 수 있었다. 그 얼마 전에 LA 폭동 사건을 TV화면을 통해 보면서, 한국여자 한 분이 폐허로 타버린 자신의 가게 앞에 멍하니 서 있다가, 괜히 이리저리 뛰던 모습을 보면서 저 분의 마음이란 지금 어떤 것일까? 주님 도와주세요, 주님 도와주세요, 하면서 나도 모르게 소파 바닥에 내려앉아 엉엉 울던 일이 기억이 났다. 너무도 흡사한 마음, 흡사한 광경이 아니었을까?
카페의 손님들이었던 사람들이 하나, 둘 출근하면서 모두 나를 찾았다. 한 쪽 모퉁이에 오늘 필요한 야채를 사들고, 넋을 잃고 서 있는 내게 다가와 내게 허그해 주었다. You’ll be O.K.… 지금도 그 때의 나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가슴이 메어진다. 그러면서 선희야! 어떻게 살았어? 그 때에… 나 자신이 내게 가장 좋은 친구가 되어서 그렇게 말을 건네기도 한다. 그때 마지막으로 내려다 보던, 비닐 봉지 속에 담겨 있던 빨강 토마토 위에 눈물이 비처럼 쏟아진 걸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그때가 가게를 시작한지 6개월이 되던 때였다. 모든 감각과 사고의 능력이 정지되는 듯 하던 그 날. 내 입 밖으로는 단 한마디의 말뿐이었다. 하나님은 알고 계셨다. 하나님은 아신다. 하나님께서 아시면 된 것이다라고 되 뇌였다. 너무도 엄청난 사건 앞에서 아무 생각도 정립이 되지 않았고, 항상 주님 앞에 부족한 나 자신을 죄송스럽게 여기고 사는 터라 왜라는 의문을 던지기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참새 한 마리도 주님께서 허락지 않으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하물며 이 일을 모르셨겠는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어린 승리에게 이 말을 조심스럽게 했을 때, 어린것이 무얼 안다고 책상 앞에 앉은 채로 주먹으로 눈물을 숨기고 있었다. 어린것도 알게 모르게 절망을 경험했을까? 승리를 가슴에 품고 한참을 울고, 지난 교회당 바닥에서 툭툭 털고 일어났듯이 승리랑 손가락 도장까지 찍고 웃고 일어섰다. 승리는 엄마 말을 이해해 주었고 아무 일 없는 듯 잘 지내 주었다. 그러니 내가 이런일 겪은 후유증의 모습을 보인다면, 나 뿐 아니라 승리에게 얼마나 나쁜 영향이 될까하여 울고 싶은 날은 밖에서 차안에서, 실컷 울고 멀쩡한 얼굴로 집에 들어가곤 했다. 어떤 날은 마음을 굳게 하고 집엘 들어서는데,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앞을 가려 다시 차를 돌려 골목 어귀에 대고 한도 없이 울었다. 이 일을 어떻게대처해야하는가. 건물주와 내 카페가 속해있는 회사측 모두 보상을 해 줄 수가 없다고 하였고, 내 가게 자체도 상해보험뿐이라서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빈손이 되었고, 게다가 감당할 수 없는 빛만이 내 어깨를 누르고 있었다. 하루도 쉴 수가 없어 아는 분 카페에 가서 잠시 일을 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일하고 돌아서면 그 괴로움은 아루 표현이 안 되었다. 하루는 돌아오는 길에 무언가 몰두해야할 것 같아서, 전에 한국에서 작품을 구상하고 시작을 하려고 문짝보다 커다란 나무를 샀다. 나무냄새 맡으면서 망치로 글을 조각하여 파내면서 하나님과 수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기도하자면 울기만 하니까 다른 방도를 생각해 낸 것이었다. 그 작품은 아직도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작품으로 가지고 있다. 난 항상 먹과 친하게 살았다. 처음 이민 와서는 좀 답답하면 먹을 갈아 먹 냄새를 맡곤 했다.
우선 몇 년이 걸리던 변호사에게 사건을 의뢰해 놓고, 내 앞에 주어지는 일은 무엇이든지 열심히 성실히 하였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을 시간이 갈수록 그 왜라는 의문이 머리를 들고 주님을 향해 따지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이었다. 이토록 주님 열심히 섬기려 애쓰면서 부지런히 일하면서도 주님생각에 주님과 얘기하며 살았는데, 그러다보니 주님께 가까이 가려하면 의도적으로 내 속에 자아가 거부하는 것을 발견했다. 주님 앞에 고개를 쳐든 나의 모습이 연상이 되면 두렵고 떨렸다. 내 마음 같지 않았다. 자연히 말수가 줄어들고 이런 모습을 승리에게 보일 수 없어서, 일부러 늦게 귀가한 일도 여러번 되었다. 이렇게 신앙의 해결을 못 잡고 있을 때, 지난날 그리도 기다렸던 우체국에서 통지가 왔다. 인터뷰 교육과정을 마치고 편지 배달 일을 하기 시작했다. 보기와는 달리, 나같이 작고 억세지 않은 여자에게는 어렵고 힘든 직업이었다. 새벽 5시부터 시작해서 거의 키의 2배 더되는 메일을 분류해서 소포와 잡지와 함께 자고 나오는 시간은 10시쯤이었다. 낯선거리, 그저 주소 번호를 따라가는 거리, 복잡한 One Way, 방어운전, 숨겨진 우편함을 찾는 일… 주소 확인… 등등 이 일을 하면서 나는 내일을 생각하는 습관이 나도 모르게 없어졌다. 그냥 하루 감사히 살면 그것으로 족한 것을 배우기 시작했다.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라는 안이숙 선생님의 찬송가사가 나의 삶의 고백이었다. 하나님께서 하루를 인도해 주셨음에 그것으로 족하면서 사는 법을 배운 것이다.
사건을 의뢰한지 3년이 흘렀을 때 수차례 법원 날짜가 정해졌고, 그때마다 가슴 조이면서 가곤하던 것이 몇차례이던가! 도저히 승산이 없을 것 같다는 말에 어깨가 축 늘어졌었다. 합의할 여지가 없는 사건이라고 무시를 당하고 드디어는 배심원 판결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나의 법적 입장은 승산이 없었다. 그러나 주님 앞에 떳떳한 것은, 나는 이 화재와 관련된 아무 잘못이 없다는 것과 억울한 자리에 내가 서 있다는 것 뿐이었다. 일하러 나가는 새벽시간이면 간절한 기도와 함께 눈물 글썽이며 새벽공기 밀고나간 것이 수도 없었다. 일하면서도 눈물에 일렁이는 하늘을 본 것도 수도 없었고, 게다가 새벽마다 부르짖는 우리 엄마의 기도는, 나로 하여금, 주님 생각하지 않을 수 없도록 내가 휘청거릴 때 잡아 주었다. 배심원 판결 10일간 계속 되었고 판결이 나던 마지막 날, 배심원들의 투툐결과가 발표되고 배심원 한사람 한사람 호명하면서 투표 결과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재판관의 정리된 낮은 소리만이 들렸다. 간간이 훌쩍이는 나의 소리가 가벼운 알러지 증상 정도로,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주님께선 드디어 나의 억울함 모두를 갚아 주셨다. 그동안의 세월을 통해 내 자신을 보게 하셨고, 내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의미가 무엇인지 친히 가르치시는 학습현장이었다. 한국에 있을 때, 한국의 복잡한 길을 일반 버스 유리창을 통해 내다 볼 때마다, 꼭 거대한 책이 펼쳐져 있는 것 같다고 여러번 생각되었었는데… 바로 불 속에서 산 것 같았던 그 시간이, 주님께서 내 앞에 펼치신 놀라운 책의 일부분이었다. 그리고 빼 놓을 수 없는 것은, 내 카페가 속해있던 회사측 변호사의 변호에서 왜 불이 났는가의 의문이 풀어지는 순간이었다. 회사의 기밀의 하나였다고 하면서 6월에 카페를 닫을 계획이었다고 하였다. 그렇게 되면 나는 그야말로 손을 비우고 나올 수 밖에 없도록 회사와의 계약서에 그렇게 명시되어 있었다. 이 딸이 숯검정된 건물앞에서 넋을 잃고 서 있을 때 나를 바라보시던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을까? 수도 없이 이유가 있단다 이일을 허락한…하고 말씀하시고 계셨었겠지―
그나마 나의 모난 부분들이 조금씩은 갈려서 더욱 믿음의 자녀답기를 애쓰는 모습으로 만들고 계셨다. 배심원 판결에서 12표중에서 9표를 얻어서 보상을 받게 되어 빚을 갚았다. 이제 원점으로 돌아와, 다시 아무 것도 없는 자리에서 열심히 일하자는 각오하나 뿐이었다. 빚이 없어짐이 이렇게도 날아갈 듯이, 내 발에 무거운 족쇠가 풀려나간 듯, 내 어깨를 내 마음을 짓누르던 납덩어리가 솜처럼 가벼워지고 급기야은 눈이 녹아내리 듯, 해방을, 자유를 가져다 주었다. 우편 배달을 여전히 열심히 일했다. 오버타임 시키는 대로 열심히 얼굴과 팔은 새까맣게 타고 몸무게는 무려 20LB가 빠져나갔다. 하루종일 걸으면서 사람은 하루종일 서 있어도 살 수 있나?이런 생각도 했었다. 다른 여자 배달부들을 보면 몸집도 크고 황소같이 기운도 세고 거인 같았다. 내겐 새다리 별명이 싫어서 무더운 여름에도 긴 바지를 입고 다녔다. 뒤에서 덮친 개에게 물린 날도 긴 바지를 입은 터라 더 큰 피해를 막을 수도 있었다. 우체부 가방을 맨 채로 잔디밭에 주저앉아, 내 얼굴 앞에 있던 꺼먼 개의 눈을 보자 Spray를 뿌려야 하는 건데 그걸 뿌리지 목하고 비명과 함께 덜덜 떨었다. 다행히도 주인이 있어서 찢어진 바지 속에 소독약을 바르고 나왔다. 하루는 새벽에 일하러 나가면서 웬지 한국에 있는 동생에게 전화를 하였다. 오늘 나를 위해 기도해 줄 수 있겠니?하면서 집을 나섰다. 일을 다 끝내고 우체국으로 돌아오다가 상상치도 못했던 차사고가 난 것이다. 사람은 안 다쳤으나 그 일로 인해 운전이 무섭고 체중은 더 줄어들고, 시말서에 여러 가지 불려다니는 일을 거치면서 우체국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렇게 내가 꿈이라고 생각하였던 직업을, 그것으로 막을 내리고 이제 다른 시작으로 또 길을 가야했다.
전 번 가게처럼 체인 카페를 작은 것으로 오픈하고 이제는 몇 년 일하고 뭐고 생각 없이 시작했다. 그냥 열심히 일할 수 있는 건강이 있길 바랬고, 승리가 배워야할 것들을 가르칠 수 있는 물질적인 면을 채울 수 있다면 그것 이상으로 욕심부릴 것도 없었다. 한해두해 해가 어떻게 흐르는지 알 수도 없이 해가 바뀌었다. 한번은 나뭇잎이 너무 많이 떨어지기에 운전도중에 창문을 열었다. 어머 바람이 심하게 부나?하면서… 그러나 바람은 별로 없었다. 문득 보니 나뭇잎 색깔이 붉고 노란 옷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10월 달 거의 끝 무렵이었다. 차를 세우고 이처럼 느끼지도 못하고 무얼 향해 이리도 달려왔고 달려가고 있는 것일까?하다가도 여기서 더 생각을 키워 볼 틈도 없이, 승리가 나보다 키가 훨씬 더 커졌다는 생각을 하면서 또다시 명확한 답이 쥐어진 것처럼 여겨졌다. 승리가 음악을 좋아하면서 가르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세상살이가 힘들 때 또 기쁠 때 음악을 할 수 있다면 삶이 얼마나 너그러워질까 생각했다. 자기의 용돈 모은 것과 내가 더해줘서 알토 섹스폰을 사던 날 승리가 좋아하던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아파트에 살다보니 연습할 땐 경찰이 문을 두드렸고, 그러면 다시 학교로 데려다주고 연습하고 돌아왔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한 때는 더블 베이스를 하였는데, 악기가 커서 난 트럭도 없고 단념을 했다. 승리가 콘서트 하던 날 학교 연습실을 기웃거리고 있는데 어떤 미국 남자가 큰 트럭에 베이스를 싣고 오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그 미국 친구 아버지가 실어오면 승리가 사용하곤 했다. 그 미국분은 내색한번 안하고 즐거운 얼굴로 번번히 그렇게 해주곤 했다. 나는 정말 이 땅에 빚이 많은 사람이었다. 승리가 7학년 때 북가주 전체의 시문학 콘테스트가 열렸다. 거기에서 2등에 입상을 하고 방송에 승리의 이름이 전파를 타고 흘러나왔다. 사막같은 엄마와 살았던 그 아이에게 어떻게 시심이 있었을까? 많이 울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내가 누린 문화생활이 있다면, 1년에 두 세 번 열리는 승리의 콘서트를 보러가는 일이었다. 아무리 피곤해도 그 시간만큼은 아주 나를 밝게 만들었다.
비오는 날이었다. 비가와도 라이드 한번 가져볼 수 없던 승리는 친구에게 전화를 한 모양이었다. 내가 너네집까지 자전거 타고 갈테니 나를 기다려 달라고… 비가 너무 많이 와서 5분가량 늦은 모양이었다. 친구엄마는 떠나 버리고 승리는 그 집 앞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학교로 거의 1.5마일 되는 길을 뛰었다. 그날 처음으로 승리가 그런 일로 우는 것을 보았다. 무거운 청바지와 담요같이 된 스웨트 셔츠가 물에 담근 듯 천근이었다. 지금은 이런 얘기들이 지난 일 가운데 하나로 얘기할 수 있으나 그 당시엔 내 눈에서 피가 흐르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제발 이런 아픔이 승리의 내면에 상처로 남지 않기를 바랬다. 가게문을 닫고 나오는데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화장실에 뛰어 들어갔다. 피가 한도 없이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멈추었다. 너무 무서워서 주님을 부르다가 내일 캐더링을 생각하고 정신 없이 시장을 보고 집에 들어갔다. 며칠 아무 일도 없더니… 금요일 오후 마무리 끝내고 앉았는데 주체할 수 없이 하혈이 계속되어 응급실로 갔다. 그 후 수술을 받으면서도 가게 일을 계속해야 했다.
손님 앞에서 아프지 않은 척하고 일하는 것이 몹시도 힘이 들었다. 가게 문 열고 2시간쯤 지나면 몸 속에 모든 에너지가 고갈되는 느낌이었다. 그 와중에서도 나를 지켜주시고 살게 하시고, 기적으로 채워주시는 주님이 고마웠다. 그러면서도 승리만 아니면 어서 나를 하늘나라로 옮겨 주시는 것이 나를 향한 가장 큰 긍휼이십니다라고 수도 없이 외쳐대었다. 차츰 건강이 회복되고 승리가 대학교로 떠나는 날이 되었다. 그 후에도 승리는 주말이면 집에 와서 가게에 무거운 일을 반쯤하고, 약국에서 일하고 그리고 밤에 학교로 돌아갔다. 한번은 금요일 밤 11시가 훨씬 넘어서 승리가 집으로 돌아온다는 전화를 받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질 않았다. 입술이 타 들어가고 입술 두께가 반으로 줄어들더니 그냥 조용히 몸 전체가 가라 않는 듯 했다. 죽음의 경험이었을까? 말도 안나오고 그냥 이번에도 주님은 아시는 거지요?라는 말뿐. 새벽 3시가 넘어 갔을까. 경찰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차가 물 속에 거꾸로 박힌 사고가 났다고 설명을 했다. 들으면서 정신을 잃을 짧은 순간이었는데 엄마! 난 괜찮어! 경찰관 뒤에서 전화기를 향해 승리가 큰 소리로 말했다. 날이 밝아 전화를 받고 사고 현장에 갔을 때 어떻게 여기서 살아 나왔단 말이냐! 경찰이 너 정말 여기에 있었어?반문했다. 이 일로 인해 승리에게 새로운 정신적인 변화가 또한 인생을 보는 시각이 달라져 가고 있는 것 같았다. 엄청난 값을 치른 만큼 얻는 것 또한 평범한 것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어려운 일을 지나오는 것들이 돈주고 살 수 없는 진정한 福의 관문인 것이었다.
해가 거듭되면서 카페가 나의 또 하나의 집처럼 되어 버렸다. 손님들은 모두 내 가족이었고, 나는 손님들의 가족상황까지 낱낱이 파악하고 안부를 물어주는 그리고, 고민도 들어주는 주제 넘는 친구가 되었다. 하기사 가족이라면 주제가 넘고 안 넘고가 어디에 있겠나, 그냥 들어주기만 해도 큰 위로가 아닌가 싶었다. 주말엔 내게 전화해서 잠시 만나는 친구도 있었고 우리 집에 방문하는 친구도 있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국적을 떠나 필리핀, 흑인, 멕시칸, 미국사람 모두가 약간씩 다른 모습의, 누구도 대신 맡아 줄 수 없는 자기만의 배역을 가지고, 인생의 길을 걷는 귀한 생명들이었다. 9년이 넘어가면서 정말로 정이 많이 들었는데, 나는 떠날 채비를 했다. 승리의 강력한 제안도 있었고, 가게를 정리하고 훨훨 날아 새크라멘토로 이사를 왔다. 이 조용한 집에서 지금까지의 삶을 종이 위에 펼쳐 보면서 참 많이 울었다.그랬었지…그랬었지…하면서. 그러나 지금은 치유된 가슴으로, 고통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음이 내 힘이 아니었음을 알기에, 너무도 주님이 감사해서 울고 웃는다.
한 몸으로 감당할 수 없는 마지막을 절감했던 그 모든 아픔, 기쁨, 슬픔을 모두 감사의 보따리에 싸서, 질끈 동여매어 어깨에 매니 짐인줄 알았던 힘든 삶이 날개가 되어, 또 한번의 비상에 큰 애너지가 되고 있음을 느낀다. 지금 일 손을 놓고 길게 호흡해 보니 바빴던 생활은 온데간데 없고, 어떤 정신으로 살아 왔는가는 정직하게 내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을 보고 있다. 그리하여, 쫓기고 쉴틈 없던 생활은 잊혀지는 것이지만 의미와 함께 남은 삶은 기억되는 것이구나 하면서, 삶과 생활의 차이를 발견한다. 편안한 생활보다 평안한 삶을 소유하기 원하고 얄팍한 즐거움인 쾌락을 쫓는 생활보다 속에서 솟아나는 기쁨의 삶을 살기를 소원한다. 언뜻보면 단어들이 비슷한 것처럼 보이나 생명과 죽음의 차이를 가지고 있음을 보고 놀란다. 어느 싯귀가 생각이 난다. 값비싼 화초는 사람이 키우고 값없는 들꽃은 하나님이 키우신다고, 그래서 들꽃의 향기는 하늘의 향기라고… 아무리 아름다운 조화가 작은 들꽃의 아름다움을 이길 수 없는 연유는, 들꽃에겐 하늘의 향기를 뿜어 낼 수 있는 생명을 소유했기 때문이 아니겠나… 비록, 나를 둘러싼 환경 속에 이민생활의 모습이 스테인드 글라스처럼 화려해 보이지 않더라도, 그 속에 하늘의 향기처럼 생명을 뿜어낼 수 있다면 내가 아닌 사람의 아픔을 들을 수 있다면, 누구든 작은 들 꽃인 것이다. 승리는 여전히 일하고 공부하고 행복한 얼굴을 드러낸다. 이제는 내가 함께 해 줄 수 있는 시간이 있건만 다 커버려 청년이 된 아들은 엄마 놀아서 좋지? 그동안 꿀벌같이 일했으니까 베짱이처럼 놀아두 돼, 나 바빠하면서 급히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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