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 곳에서 자유와 민주주의의 도도한 역사를 감지했다. 나는 그 곳에서 ‘권위’의 진면목을 목격했다. 품격 있는 권위, 백성들이 우러러보는 권위, 두렵지 않은 권위는 저속하고 손가락질 당하고 눈 부릅뜬 고약한 ‘권위주의’와는 생판 다르다. 나는 그 곳에서 국가라는 공동체의 자랑스런 프로파일과 규범과 전통이 살아 숨쉬고 있는 현장도 목격했다. 그 현장의 감회가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인간의 훈훈한 사랑과 흠모와 존경과 가슴 찡한 석별의 현장이 목격되지 않았다면, 나의 눈가에 이슬을 맺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국 제40대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의 국장이 있던 날 나는 자문했다. 국가란 무엇이며 지도자란 어떤 인물이어야 하며 백성들이란 나라를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 국가 간판을 내건들 힘없는 약소 국가라면 무슨 가치가 있는가. 권위를 강요하고 권력을 이용해 부정과 부패를 일삼는 통치자라면 무슨 존경을 받겠는가. 지나간 역사를 깡그리 부정하고 반목의 투쟁을 일삼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사회주의와 민족 지상주의의 망령에 사로잡힌 구시대적 이데올로기적 국민들이라면 미래와 세계를 무슨 자격으로 떠벌릴 수 있겠는가.
훤칠한 용모에다 언제나 넉넉한 웃음으로 보는 이의 마음을 푸근하게 해주던 레이건의 어제와 국가 통치자로서 단호한 결정과 열정으로 나라를 다스리던 카리스마의 역정들이 브라운관에 흐르고 성조기가 덮인 위인의 관이 ‘대통령 찬가’와 ‘뷰티플 아메리카’의 애잔한 연주 속에서 움직일 때 아마도 많은 미 국민들은 눈시울을 붉혔을 것이다. 나는 단언한다. 레이건의 장례식이 펼쳐진 워싱턴에서, 캘리포니아 시미밸리에서 전해진 그 현장들이야말로 미국의 힘과 정신과 보편적 가치를 가감 없이 보여 준 감격의 장에 손색이 없었노라고.
또 친미 타령이냐고 눈을 흘기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남의 나라, 그것도 요즘 한국의 젊은이들이 ‘적대국가’라고까지 주먹을 흔들어대는, 그래서 지난 주말 광화문 광장에서 또 다시 벌어진 촛불시위의 타깃이 된 양키의 나라에 그처럼 찬사를 보내는 걸 보니 반민족 수구세력의 넋두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들의 비난을 감수할 준비가 돼 있다. 제 나라의 오늘을 지켜준 은인을 분단 주범으로, 통일 방해 세력으로, 급기야는 ‘잠재적 적대국’으로 모는 자들의 비난이라면 별로 두려울 게 없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그 감격의 현장에서 눈을 돌리자마자 곧 바로 내 시야에는 조국의 현장들이 밀려들었다. 그리고 이내 우리의 험난한 역정을 돌아보며 입맛을 다신다. 스타스 앤드 스트라입스 밑에 누운 저 캘리포니아의 영웅처럼 생전에, 그리고 사후에 국민들로부터 존경받는 지도자가 나올 수 있을까.
아니 존경은커녕 손가락질 받지 않으면 천만다행인 게 우리의 전직들 아닌가. 불법적인 군사 쿠데타로 국가변란의 죄를 짓고 감옥살이를 하지 않나, 수천억 비자금을 숨겼다 들통나 검찰에 불려가 먹은 돈 토해 내질 않나, 아들과 측근들이 해 먹다 법의 철퇴를 맞지 않나… 인격과 도덕과 체통에 먹칠한 전직들만 가진 나라, 그게 한국이다. 제럴드 포드, 지미 카터, 조지 부시, 빌 클린턴 등 먼저 간 전직을 추모하기 위해 도열한 전직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신세가 형편없이 초라하게 느껴진다.
유월의 초여름인 서울의 풍경은 그래도 상쾌하다. 하지만 이 곳 저 곳 아스팔트 위에서, 그리고 이 건물 저 건물 속에선 붉은 깃발과 확성기의 파열음이 난무한다. 민주노총 사람들의 여름 투쟁(하투)이 한국의 6월을 달구고 있는 탓이다. 병원의 나이팅게일들도 유니폼을 벗어 던지고 붉은 머리띠를 맸다. 봉급 올리고 근무일수 줄이라는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백의의 천사이기를 거부한다.
식품현장은 때아닌 ‘만두 파동’으로 들끓는다. 중국에서 수입한 썩은 단무지를 구정물에 빨아 만두 속을 만들어 백화점 식품코너에서 팔아왔다. 한국인들의 공해 저항력은 대단하다. 썩은 만두 속을 그렇게 많이 먹고도 끄떡없으니 말이다. 만두뿐일까. 오리고기에 공업용 송진을 발라 털 뽑아 내다 팔고 공업용 수입 소가죽에 붙은 고기 떼어내 설농탕 끓여 팔고 시어 터져 쓰레기로 버릴 중국산 김치 말려 라면 수프 만들고… 한국인들의 그 잔머리 굴리기가 이처럼 종횡무진인 줄 누가 알았으랴.
못된 시정잡배들의 사기행각은 그렇다 치자. 나라를 운영하는 저 높은 벼슬의 집권세력들의 거동은 어떤가. 수도 이전 문제만 해도 그렇다. 처음엔 행정수도라더니 이젠 서울을 몽땅 옮겨갈 태세다. 그것도 속도전을 방불케 한다. 행정부에서 국회 대법원까지 옮기겠다니 그게 ‘천도’가 아니고 무엇인가.
국가적 대사를 대통령 선거에서 이겼다는 이유 하나로 밀어붙이고 있는 노무현 정권의 속셈은 무엇일까. 주한미군 감축으로 늘어날 막대한 국방비에다 천도에 들어갈 천문학적 예산은 어쩔 것인지? 수도서울, 서울대학교, 재벌, 보수언론, 비판적 지식인… 노 정권 사람들이 지목한 5개 개혁 대상이 서울에 몽땅 웅거하고 있기에 이들을 일거에 해치울 확실한 비첩이 천도인가.
하지만 집권 세력들은 알아야 한다. 이제 남은 집권기간은 3년 반, 결코 긴 시간이 아니다. 그리고 역사의 흐름은 언제나 거대하다. 한 정파의 존재는 그 흐름 속의 포말에 불과할 뿐이다.
안영모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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