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숙<수필가>
지수는 남편의 등을 야무지게 째려보았다. 행선지는커녕 그는 아내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횅하니 사무실을 나가버렸다. 남편은 벌써 이틀째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녀는 선뜻 한기를 느낀다. 출근하자마자 진한 모닝커피를 마셨는데도 또 한잔의 커피가 절실해진다. 그녀는 포트에 남아있던 커피를 쏟아버리고 콩을 갈아 새로 커피를 내렸다. 헤이즐넛 향과 함께 그녀의 가슴속으로 노여움이 스멀스멀 번졌다.
권지수, 그녀는 한 남자의 아내이자 그의 사무실 비서며 또 두 아들의 엄마다. 이민 7년 차인 그녀는 회계사인 남편 덕분에 남들보다 빨리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지난 7년 동안 그녀의 삶은 누구보다 치열했다. 그러므로 내내 사무실과 아이들 건사에 종종대던 그녀에게 작년 한국방문은 일종의 포상휴가인 셈이었다.
그녀는 한국에 나가자마자 먼저 선희부부를 방문했다. 선희의 남편은 친구의 남편이라는 인연 외에도 처녀시절 함께 사보를 만들던 옛 직장동료다. 마침내 지수가 사내 결혼을 하게되자 이후 그 두 커플은 가족보다도 더 살갑게 지냈다.
지수씨 이제 다시 글 좀 써봐요. 아까운 재능 썩히지 말고. 정식 등단을 한 것도 아니고 대학교 때 대학신문사주최 소설공모에 당선된 경력밖에는 없는 그녀를 선희남편은 한결같이 신뢰했다. 그런데 막상 사보편집장으로 있는 그가 ‘샌프란시스코 아리랑’이란 제목의 꽁트 연재를 제안해 오자 지수는 몹시 망설였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연재를 시작했고 이민자들의 애환을 담은 그 코너의 반응은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
커피포트가 마지막 방울을 떨구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지수는 커피 한 잔을 다 마신 후에야 겨우 서운한 마음을 좀 가라앉혔다. 그리고는 이번 부부싸움의 발단이 된 꽁트를 복기하듯 꼼꼼히 되짚어보았다.
...... 가게를 벗어나 바라보는 남편은 언제나 낯설다. 비즈니스 파트너로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남편이지만 집안에서의 그는 그저 외간남자일 뿐이다. 우리는 언제부터 이렇게 됐을까? ...... 모처럼 함께 쇼핑을 나온 일요일 오후, 남편과 나는 2시간 후에 다시 만나기로 하고 각자 떨어져 쇼핑을 즐겼다. 남들도 이렇게 사나? ...... 저게 누구야? 야한 속옷을 파는 ‘빅토리아즈 시크릿’ 앞에 서있는 남자는 분명 남편이었다. 검은 브래지어와 팬티를 걸친 관능적인 마네킹 앞에 그는 오랜 시간 멈춰서 있다. 그의 얼굴은 가게에서 보았던 영리한 상인의 그것도, 또 집에서 보았던 무덤덤한 사내의 것도 아닌 제 3의 무엇이었다. ...... 오늘도 역시 늦은 저녁식사를 마친 남편은 TV 앞에서 잠이 들었다. 그날 남편 몰래 사들고 온 검정색 브래지어와 팬티는 아직도 상표를 달고 남편처럼 서랍 속에 잠들어있다. 서글픈 우리들 풍경을 담고 샌프란시스코의 밤은 또 그렇게 깊어만 간다.
권지수! 잠깐 이리 좀 와봐! 엊그제 오후 이메일을 체크하던 남편이 그녀를 급히 불러 세웠다. 그녀가 막 아이들 픽업을 나가려던 참이었다. 무슨 일인지 남편의 얼굴은 터질 것처럼 붉어져있었다.
도대체 이번 꽁트에 뭘 썼길래 이런 편지가 오는 거야? 지수는 남편의 손가락을 따라 컴퓨터 화면을 읽어 내렸다. 예전 직장동료인 영진씨의 편지였다.
...... K형, 힘내서 지수씨 살맛 좀 나게 해줘요. 우리가 지수씨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보약이라도 한 첩 보내야 돼나?(^^) 그렇게 힘들면 다시 돌아와요. 함께 사업이라도 해봅시다. 영진
그날 밤 그녀의 꽁트를 읽은 남편은 거의 폭발 지경이 되었다. 도대체 이게 뭐야! 빅토리아즈 시크릿? 검정 브래지어? 당신 미쳤어? 당신이 무슨 전문 작가라도 돼? 아줌마가 뻔뻔하게 어떻게 이런 글을 써. 남편인 나는 또 뭐가 되라고!
지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애초 남편은 문학과는 거리가 멀었다. 문과대학 출신인 그녀는 학창시절부터 줄곧 문학을 한다는 감상적인 남자들에 둘려 싸여 있었다. 그들은 물론 대화를 하고 세상을 함께 고민하기에는 무리가 없는 부류였다. 그러나 그녀는 점차 그들의 탐미적이고 염세적인 성향이 지겨워졌다. 그즈음 인생플랜이 확실하고 현실적인 지금의 남편이 그녀의 삶에 텀벙 뛰어들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지금껏 그럭저럭 세월을 잘 헤엄쳐왔다.
픽션이잖아, 픽션! 그렇게 모든 걸 작가 자신의 얘기로 믿으면 도대체 무슨 글을 쓰란 말이야. 순간 속 좁은 남편도, 순진한 독자도 원망스러워 지수 역시 제법 큰소리가 나갔다.
좀 고상한 얘길 쓰면 될 거 아냐. 왜 하필이면 그런 주제냐고. 그리고 당신, 나한테 불만 있으면 직접 말로 해, 여기저기 응원군 끌어들이지 말고.
거의 하루종일 붙어있으면서 서로의 시선을 피하기란 영 고역이었다. 사실 사무실 일이야 늘 해오던 거니 대화 없이도 별 불편이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지수는 일하는 재미도, 또 사는 재미도 시들해졌다.
커피를 너무 많이 마신 탓인지 지수는 통 점심 생각이 없었다. 2시가 지나서야 냉장고를 뒤져 어제 먹다 남은 인절미 두세 쪽을 전자렌지에 데웠다. 그때 마침 아침나절에 나간 남편이 돌아왔다.
나 SF전자 김사장 만나고 5시쯤 돌아올게. 남편은 여전히 그녀의 눈을 피한 채, 그녀의 책상에 쇼핑백 하나를 내려놓고는 다시 서둘러 나갔다.
여보, 옹졸하게 굴어 미안하오. 오늘 ‘빅토리아즈 시크릿’에 들러 당신 줄 선물을 하나 샀소. 샌프란시스코의 밤이 왜 그리 우울하기만 하겠소. 그나저나 앞으로 그곳이 내 전용 놀이터가 되더라도 내 탓이 아니라는 걸 밝혀두오. 사랑하오.
남편의 카드를 읽는 동안 그녀의 얼굴은 홍당무가 되었다. 어, 어... 글로 쓸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지수는 검정 브래지어와 팬티를 황급히 서랍 속에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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