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미래학자도 점성술가도 아니다. 한국의 정치현상을 지켜보며 나름대로 분석을 시도하는 언론인일 뿐이다. 따라서 나의 정치 논평은 언론적 시각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러니 족집게 예측은 언감생심이다. 한데 나의 어중간한 예측이 들어맞을 때, 내 심경은 씁쓸하다. 차라리 빗나가는 게 나라를 위해 좋았으련만 하는 생각에서다.
한미관계 예측이 그 중 하나다. 나는 김대중 정권 때부터 줄기차게 한가지 경고를 던져왔다. “미국을 화나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부시를 화나게 하자 말라”는 것이었다. 노무현씨가 의기양양하게 대선 전투에서 이회창씨를 패퇴시키고 당선의 영광을 안고 ‘당선자’로서 어깨를 쫙 펴고 있던 때에도, 나는 눈치코치도 없이 같은 경고를 발했다. 두 달 뒤면 청와대의 지고지엄한 자리에 오를 당선자 노무현씨가 느닷없이 이렇게 말한 때였다. “남북관계만 잘되면 다른 것은 깽판 쳐도 좋다” 그렇다면 경제는? 그리고 한미관계는? 국민통합은?--북한의 김정일 정권과 잘만 지내면 다른 모든 국가 현안은 ‘깽판 쳐도’ 좋단 말인가? 이는 나만의 의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가뜩이나 대선 직전 벌어진 ‘여중생 추도 촛불시위’로 반미 분위기가 어느 때보다 고조된 시기였다.
한국이 처한 안보 현실과 경제적 이해 그리고 워싱턴 정치사의 무서운 교훈들을 감안 할 때, 새 집권자가 우방 미국을 자극하는 발언을 하는 것은 무모하기 이를 데 없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부시를 화나게 했다가는 필시 ‘외교적 보복’이 올 것임을 예감했다. 부시가 누구인가. 프라이드 강하고 혈기방장한 텍사스 출신, 게다가 그의 공화당 행정부 요직들이 하나같이 ‘네오콘’들로서 ‘강한 미국’ ‘위대한 미국’을 지향하는 매파들이 아닌가.
노무현정권 출범 1년 반 뒤, 올 것은 왔다. 불행하게도 나의 예측이 적중한 셈이다. 대통령 탄핵문제로 온 나라가 잔뜩 긴장하고 있는 가운데 ‘대통령의 위법 사실은 인정되나 탄핵할만한 사유는 안 된다’는 헌법재판소의 ‘이상한 판결’이 나온 바로 그 날, 워싱턴은 주한 미군 일부를 빼내겠다고 통보했다. 아주 일방적인 통보였다. 그것도 노 대통령이 아슬아슬 탄핵의 ‘긴 터널’(본인 표현)을 벗어나 환희의 축배를 들고 있을 때였으니 무슨 의도였을까 헤아려보게 되는 건 당연하다. 부시가 전화를 걸어 “아주 정중하게 주한미군 일부 철수계획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했다”는 것과, 이에 대해 노 대통령이 “양해했다”는 게 청와대 발표였지만, 두 사람의 심경은 오월동주였을 것이다.
주한 미군 3,000명이 한반도를 빠져나가 이라크로 재배치된다는 이번 결정 그 한가지만 놓고 본다면 큰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그 저변에 깔려있는 의미와 파장은 예사롭지 않다. 한마디로 부시는 지금 화가 나 있다. 미국을 대하는 노무현정권의 대미 정책에, 그리고 미국민을 향한 한국민의 반미정서에 심대한 배신감을 갖고 있음이 분명하다. 부시의, 그리고 미국민의 그런 감정이 옳고 그르고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워싱턴으로부터 ‘한미간의 신뢰는 무너지고 있다’는 경고가 자주 나온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지금 워싱턴은 서울을 향해 ‘보복의 칼’을 들이 대고 있다. “우리가 이라크에서 곤욕을 치르고 있는데, 한국군파병을 이리 끌고 저리 끌며 약을 올려? 그게 은혜 입은 동맹이 할 짓인가. 자주국방해 보겠다면 좋다. 우리 군대를 빼낼 수밖에. 먼저 3천명이지만 더 빼내가도 불평하지 말라”--이런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셈이다.
사태가 이렇다면 우리 형편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닐 것이다. 미군이 빠져나가면 수십 조 원의 국방 예산을 짊어져야 한다는데 그 게 가능할까, 미국이 재채기를 하면 감기 드는 판에 가뜩이나 어려운 우리 경제는 어찌 될까, 이러다 국제 사회에서 ‘왕따’ 당하는 건 아닐까--걱정이 태산같을 것이다. 한데 참 신기하기도 하다. 한국을 지배하는 집권세력은 말할 것도 없고, 그저 평범한 백성들 다수도 ‘무슨 걱정이야? 전쟁 같은 건 없어. 미국X 눈치 안 보고 살면 좋지’하고 느긋해 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는 공연한 짐작이 아니라 최근 한 여론조사의 결과다. 글세, 우리가 그럴 힘이 있다면 뭐 아쉬워 미국 힘을 빌릴 것인가. 우리 자신의 힘으로 나라를 꾸려나가는 것만큼 좋은 일이 어디 있는가. 나도 그런 생각이다.
하지만 좀 더 눈을 비비고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는 게 명백하지 않은가. 구 독일이 힘이 없어 미국 도움을 받았는가. 지금 일본이 돈이 없어 미국 핵우산 밑에 몸을 의탁하고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는 건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우리가 독일이나 일본만 못하다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임으로. 그렇다면 무얼 믿고 미국 등을 밀어내는가. 아무리 따져 보아도 나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다. 한데 얼마 전 청와대 영빈관 드넓은 홀에서 과거 운동권의 애창곡이 힘차게 울려 퍼졌다. ‘임을 향한 행진곡’이라던가. 그 노랫말 속의 ‘임’은 누구일까? 민주화? 그건 이미 끝난 스토리가 아닌가. 그렇다면 통일? 혹은 특정인? 만찬장에 모인 열린우리당 당선자들은 이 노래를 부르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노 대통령도 울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불현듯 하나의 외침이 내 고막을 때렸다. 올 초 ‘노사모’(외곽 지지세력들)를 향해 던진 집권자의 예언 같은 외침--’우리의 혁명은 끝나지 않았다!’ 그 혁명의 끝은 과연 어딜까?
안영모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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