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상 <수필가>
수많은 날은 떠나갔어도 내 맘의 강물 끝없이 흐르네. 그 날 그땐 지금은 없어도 내 맘의 강물 끝없이 흐르네 이수인 작사 작곡 <내 맘의 강물>이다. 이 가곡은 가슴엔 듯 눈엔 듯 또 핏줄엔 듯 내 마음의 어딘 듯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라고 노래한 김영랑의 시에서 영향을 받은 듯 하다.
아무튼 이 노래를 부를 때면 공주(公州) 금강 풍광이 이슬 빛 흐린 모습으로 내게 다가오곤 한다. 금강은 60년대의 역사성과 서사적 요건이 맞물린 신동엽시인의 장편서사시 <금강>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이제는 심신이 지쳐버려, 아니면 시대 변화의 영향인지 금강은 내게 서정적 감성으로 만 받아드려진다.
내가 처음 만난 금강은 끊어진 다리 밑을 나룻배로 건너야했다. 읍내로 진격하던 인민군 탱크가 포구를 하늘로 향하곤 깊은 물살에 잠겨있었다. 강물이 탱크를 막아 준 고마움을 기억하는 이가 이제 몇이나 될까. 강둑으로 이어진 포플러의 합창, 은빛 백사장, 속살이 훤히 보이는 푸른 강물이었다.
조선조 때 인조가 잠시 피난 내려왔다던 산성, 그 누각에서 내려다보이는 강물을 나도 북의 아버지가 그리울 때면 찾아가곤 했다. 이제 지난 세월은 강물처럼 흘러가 버렸다. 그러나 만약 강물이 멈춘다면 그것은 늪이 되고 우리들은 젊은 날 기개도 펴보지 못한 체 물과 함께 썩어 버렸을 터이다.
강가에서 자란 사람이면 누구나 공범처럼 마음의 강물이 흐른다. 깊어져서 소리 없이 흐르기도 하고 너무 추우면 얼어버리기도 하고 따뜻해지면 안개 강이 된다.
아직도 시작이려니 하던 나의 강물은 내가 저를 인식도 하기 전에 흐르고 흘러 영원의 바다 인근에 이른 듯 싶다. 요즈음 가장 부러운 이가 누구냐고 내게 묻는다면 자기 고향을 지키며 섬진강 언덕에서 시를 쓰는, 초등학교 분교선생님 김용택시인이다.
물은 또 얼마나 흐르고 모여야 저렇게 말없는 물이 되어 마침내 제 몸 안에 지울 수 없는 청청한 산 그림자를 그려내는지 곁에 있어도 그대가 그리운 것처럼 그의 시를 보면 강에 살면서도 강이 그립다. 물이 산을 두고 가지 않고 산 또한 물을 두고 가지 않는다. 그 산에 그 강 그 강에 가고 싶다.
돌아보면 지난 세월을 강물처럼 살았어야 했다. 언제나 순리대로 낮은 곳으로 흘러야 했다. 무엇보다도 욕심 없이 흘려 보내야 했다. 옛날, 공주 금강 둑이 넘쳐 홍수 난적이 있었다. 화가 난 물은 불보다도 무서웠다. 아무리 좋은 것도 넘치는 것은 재앙이었다.
그러나 강물은 언제나 서로를 껴안고 흐른다. 기쁨도 슬픔도 무엇보다도 다부지지 못한 나로 인하여 상처받은 이들의 아픔까지도 다독이며 나의 강물도 그렇게 흘렀으면 좋겠다.
서울에 잠깐 머무는 동안 중학동창 아들 결혼식장에서 재정이를 만났다. 그는 제 아내에게 나를 끌고 가더니 야가 나보고 엿장수라고 놀린 미국 사는 애여 - 하고 일러 바쳤다. 별것 다 기억하네 모두들 박장대소했었다.
금강 다리건너 살면서 새까맣게 탄 얼굴로 달려오곤 했으니 읍내 아이들로 봐서는 정말 촌놈이었다. 지금은 그가 사는 전막이 공주시로 편입되고 친구네 밭과 산은 종합대학교와 아파트와 상가로 변해 버렸다. 그는 지난해 미국 여자 골프대회에서 두 번이나 우승한 한희원 의 시아버지다. 올해 실업야구팀을 은퇴한 아들 손혁은 박찬호와 같은 해 공주고교 투수였다. 그런데 금강 때문일까 재정이는 순박함이 무공해 옛날 그대로였다.
그는 내게 고향에 들렸다 가라고 권했다. 당일치기로 서둘렀는데 일이 바빠 공주에 이르니 어두웠다. 친구 부인이 정성껏 차린 음식에는 먼 세월을 달려온 그리운 맛이 담겨있었다. 11살의 음식 맛은 평생 간다지 않는가.
밤에는 집 앞 금강엘 나갔다. 번화한 강변도로와 또 다른 다리, 인접한 건물들과 자동차들의 어지러운 불빛으로 강은 늙고 지쳐있었다. 친구는 자고 가라지만 막차의 차창 밖으로 검은 산성(山城)은 금강을 껴안고 울고 있었다. 친구야 금강아 잘 있거라.
문득 고교시절 옆집소녀 생각이 났다. 목련꽃 그늘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4월의 노래>를 시도 때도 없이 불러댔더니 담 너머로 그녀는 좀 조용 하라는 듯 <베르테르의 편지> 책을 건 냈다. 목련의 그 미소가 다시는 뒤 돌릴 수 없는 어두운 저 편에 있었다.
새파란 하늘 저 멀리 저 멀리 구름은 두둥실 떠나고 비바람 모진 된서리 지나간 자욱마다 마음은 아파도 알알이 맺힌 진주 알 아롱아롱 빛나네. 그 날 그대 지금은 없어도 내 맘의 강물은 끝없이 흐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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