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 민주화·테러와의 전쟁에 장기적 타격
게릴라 준동 막기위해 가혹한 취조 선택
소수 비행보다 조직적 학대 가능성 높아
럼스펠드장관 사임이 최소한의 해법 수순
이라크 공격을 주도한 네오콘들이 아랍인의 심리 상태를 이해하기 위해 즐겨 읽는 책이 있다. 컬럼비아와 프린스턴 대학에서 교편을 잡은 인류학자 라파엘 파타이가 쓴 ‘아랍 마인드’라는 책이다. 1973년 출판된 이 책에서 파타이는 “아랍인들은 성 문제를 타부시 해 기피증세를 보이고 있으며 특히 동성 연애 문제는 이를 공개적으로 거론하는 것조차 극도로 꺼리고 있다”고 적었다.
이번 아부 그라이브 포로 학대 사진 중 남성 포로를 벗겨 놓고 동성애를 하는 듯한 포즈를 취하게 한 장면이 많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아랍인들이 가진 문화적 약점을 최대한 활용, 필요한 정보를 빼내겠다는 취조관들의 의도가 담겨 있다. 실제로 웬만한 방법으로는 입을 열지 않던 포로들도 동성애를 연상시키는 나체 사진을 찍어 놓고 이를 “가족에게 보내겠다”고 협박하면 순순히 게릴라 활동에 대한 정보를 털어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도덕적 타락이 대개 그렇듯이 미군의 포로 학대도 많은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서서히 넘어서는 안될 선을 넘기 시작했다. 인권 관계자들은 이라크 포로들에 대한 조직적인 학대가 시작된 시점을 작년 8월 관타나모 수용소 사령관인 조프리 밀러 소장이 이라크를 방문하면서 부터로 잡고 있다.
작년 8월은 일단 미군이 바그다드를 점령하면 평온할 것이란 당초 예상과는 달리 게릴라 준동이 격화되던 시기다. 게릴라들의 뜻밖의 저항에 놀란 국방부는 알 카에다 취조 전문가인 밀러를 불러 게릴라 진압에 관한 의견을 들었다.
미국은 알 카에다를 비롯한 극렬 테러분자를 관타나모에 수용하고 이들이 전쟁 포로가 아니라 불법 테러리스트라는 이유로 제네바 협정이 보장한 포로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다. 취조 방식도 일반 포로와는 달리 잠을 재우지 않고 방안 온도를 극도로 춥거나 덥게 하고 가혹한 기합을 가하는 ‘특별 프로그램’(special access program)을 썼다. 이 방식은 효과를 거둬 신앙과 훈련으로 단련된 테러범들도 미국이 원하는 정보를 불기 시작했다.
여기에 고무된 국방부는 이 방식을 이라크 게릴라 용의자들에게도 적용키로 했다. 극렬 테러분자에게나 적용하던 방식을 멋모르고 잡혀온 평범한 시민이 섞여 있는 이라크 교도소내 수감자들에 적용하는 것은 무리라는 반대가 있었으나 묵살됐다. 게릴라 준동을 차단하는 데 필요한 ‘인적 정보’가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을 처음 육군 범죄 수사과에 고발한 사람은 조셉 다비 헌병이다. 그러나 지난 1월 포로 학대 사진이 담긴 CD와 보고서를 접수받고도 미군 당국은 지난 4월 CBS가 보도하기 전까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를 극소수 분자의 소행으로 돌리고 방송을 연기해 줄 것을 요청했을 뿐이다.
국방부는 아직까지 포로 학대는 빗나간 소수 미군의 소행이며 상층부는 이와 무관하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그러나 포로를 학대한 미군 병사들이 웃는 얼굴로 학대 장면 기념 사진을 찍은 후 이를 친구들에게 e메일로 보내기까지 한 점으로 미뤄 보면 포로 학대에 대한 통제는커녕 이를 조장하는 분위기가 만연돼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번 포로 학대 사건은 이라크 안정과 아랍 세계화의 민주화라는 미국의 목표에 장기적으로 중대한 타격을 입힐 것이 분명하다. 우선 포로 학대는 대량 살상 무기가 발견되지 않고 있는 상태에서 미국이 내걸고 있는 인권 향상이란 명분에 지울 수 없는 손상을 입혔다. “다시는 사담 치하에서와 같은 인권 학대는 없을 것”이라 부시 대통령의 말이 웃음거리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더구나 이번 학대는 아랍인들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성적 문제를 건드렸다는 점에서 두고두고 아랍인들의 분노를 촉발할 것이다. 알 카에다를 비롯한 테러 단체에게 미군 여성이 벌거벗은 아랍 남성을 개처럼 끌고 다니는 사진만큼 자원병 모집에 효과적인 수단은 없다.
문제가 더 심각한 것은 지금까지 공개된 사진이 포로 학대 사건의 전모가 아니라는 점이다. 국방부는 이 사건을 조사하기 위한 연방 상원 청문회에서 비공개를 조건으로 추가 사진을 제공했다. 사진 내용이 너무 끔찍해 이를 공개했을 경우 이라크 내 미국인들의 신변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 사진을 보고 나온 한 상원의원은 “각오는 했지만 내용이 상상 이상이었다”며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국방부는 19일 이번 사건을 저지른 말단 병사 하나에게 처음 유죄 평결을 내리고 징역형과 불명예 제대를 명했다. 국방부 고위층은 이를 피라미들의 잘못으로 돌리고 적당히 덮어 버리려는 유혹과 압력을 받을 것이다. 이를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미군의 명예 실추는 물론 다가올 대선에서 부시 행정부에게 악재로 작용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 수 십 년 간 미국 역사를 보면 추문이 터졌을 때 이를 덮으려 했다 나중에 사건 자체보다 은폐 행위가 문제가 돼 파장이 더 커진 예가 수두룩하다. 베트남 미라이 양민 학살 사건이 그랬고 워터게이트가 그랬고 클린턴 시절 화이트워터와 르윈스키 스캔들이 그랬다.
지금 포로 학대 사건과 관련 가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사람은 국방부 정보 담당 차관을 맡고 있는 스티븐 캄본이란 인물이다. 관타나모의 ‘특별 취조법’ 이라크에 확대 적용하는데 가장 앞장섰던 사람이 바로 럼스펠드의 심복인 그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사건의 궁극적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은 럼스펠드 국방장관이라는 게 리버럴과 보수파를 포함한 미국 조야의 폭넓은 의견이다. 보수파 논객의 대표격인 조지 윌은 “럼스펠드는 양식이 있는 인물로 자신이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이 진정으로 미국의 국익을 위하는 것인지 아닌지 잘 알 것”이라며 “무덤은 한 때 꼭 그 자리에 있어야 했던 인물로 가득 차 있다”는 말로 그의 사임을 촉구했다. 네오콘의 대표 잡지 ‘위클리 스탠더드’ 편집장인 빌 크리스톨도 “지금 이라크 사태는 획기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빠질 수도 있는 위기”라며 전후 처리에 실패하고 있는 부시 행정부의 실정을 비판했다.
럼스펠드가 사임하고 올 선거에서 부시가 낙선한다 한들 미군에 의해 수모를 당한 아랍인들의 이미지는 오랫동안 중동 사람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사태의 총책임자인 럼스펠드가 그 자리에 남아 있어 가지고는 사태 수습의 실마리가 풀릴 가능성은 없다. 럼스펠드 사임은 상처받은 아랍인들을 달래고 악화 일로를 걷는 이라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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