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 폭풍이 훑고 지나간 한국의 정치판엔 너절한 파편들이 깔려있다. ‘제2의 집권’이 어떻고, ‘상생 정치’가 어떻고 말들은 그럴싸하지만 그 뒤 안 길의 풍경과 속마음은 딴판이다. ‘봤지? 우리가 죽을 줄 알았나’하는 승자의 오만과, ‘승패는 병가의 흔한 일, 어디 다시 보자’는 패자의 적개심이 얼굴을 숨기고 있다.
나는 이번 대통령 탄핵을 둘러싸고 전개된 한국의 여러 현상 속에서 하나의 확실한 심증을 다시 확인했다. ‘살아있는 권력은 강하다’라는 움직일 수 없는 결론-- 국민이라는 이름의 대중도, 헌법 수호자라는 검찰이나 사법부도 그 살아있는 권력을 함부로, 아니 법대로 어쩌지는 못한다는 ‘한국적 왜곡’을 재확인했을 뿐이다.
이회창 캠프는 족치고, 노무현 캠프에는 칼을 댈 듯 말 듯 하던 검찰이 탄핵 기각 결정이 나오자 묘한 이론을 만들어 ‘두 사람 무혐의’를 선언하려는 것은 ‘살아 있는 권력’을 보호하려는 미운 놈 봐주기에 지나지 않는다. 헌재 결정도 따지고 보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부분이 없지 않다. 선거법 위반에 헌법 정신 위배가 분명하다고 해 놓고 탄핵 사유는 안 된다니 이 게 무슨 논리인가, 나로선 이해하기 어렵다.
탄핵사태를 둘러싼 싸움에서 승자는 권좌에 앉아 있는 ‘노 대통령과 그 지지자들’임이 틀림없다. 국회 탄핵이라는 한국 헌정사 초유의 수모를 당하고 근 두 달 동안 헌법재판소 판결을 기다려야 했던 승리자들의 마음은 ‘파면 결정이야 나겠나’하는 뱃심에도 불구하고, 만에 하나 보따리를 싸는 게 아닌가 초조했던 것도 숨길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마침내 승리했다. 이제 그들은 승리의 팡파래를 울리며 환희의 찬가를 드높이 외치고 있다. 그리고 또 외친다. ‘우리 길을 막는 자 누군가. 반개혁·반민주·반통일의 수구반동과 친미주의자들은 가라. 이제 가열찬 시민혁명은 시작됐다!’ 그들은 지금 논공행상과 세상 바꾸는 ‘밑그림 그리기’에 여념이 없어 보인다.
위기가 기회라고 했던가. 탄핵사태는 노무현 캠프에 황금의 기회를 선물했다. 40여명의 초라한 국회 의석이 그 3배로 껑충 부풀어 명실상부 다수 집권당의 면모를 과시했다. 그리고 드디어 그 주군인 노무현씨가 탄핵 사슬을 풀고 해방되는 감격을 맛보았다. 이제 무엇을 두려워하랴. 거대 야당을 ‘차떼기 부패정당’으로 각인시켜 무너뜨렸고, 한 통속 밥을 먹다 밀어 낸 DJ(김대중)의 민주당을 그 텃밭인 호남에서조차 일패도지시키고, 줄타기 곡예정치로 용케도 난국을 헤쳐 온 JP(김종필)를 아예 땅 속에 묻어버린, 이 엄청난 개가 앞에 그들 자신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을 정도다.
승리자들의 겹경사를 지켜보는 패배자들의 마음은 그러나 씁쓸하고 장탄식에 싸여있다. 그 착잡한 심경은 미루어 짐작할 만 하다. 아니 이럴 바에야 탄핵의 칼은 무엇 때문에 빼들었는가. 노무현씨 자신이 불법선거자금 받은 게 한나라당의 10분지 일을 넘으면 대통령을 그만 두겠다고 했으니 그 것이나 지켜 볼 일이지, 이 마저 면죄부를 주었으니 이런 낭패가 어디 있단 말인가. 게다가 국회 의석마저 태반을 잃어 견제할 힘도 없어진 판에 무얼 갖고 싸운단 말인가. 이런 장탄식은 한나라당 정치인들의 입에서만 흘러나오는 것은 아니다.
지난 총선 때 열린 우리당을 지지하지 않은 유권자의 대부분, 숫자로 치자면 유권자절반 가까운 사람들의 가슴에도 응어리가 맺혀있다고 봐야한다. 바로 이 점이 앞으로 이 나라가 편치 않을 것임을 예고하는 징표다.
하지만 거듭 말하거니와 패배자들의 권토중래는 쉽게 달성될 것 같지 않다. 나는 그 큰 이유를 한국민의 ‘덜 깨어남’에서 찾는다. 경제가 나빠져 장바구니를 오그라들게 한 책임자는 누구인가. DJ정권과 그 후계자인 노무현 정권이 아닌가. 일자리는 날이 갈수록 작아지고 금융파산자는 전체 인구의 4분지 1을 넘는 판인데도 바로 그 피해 당사자들이 반미 촛불시위를 주도하고 탄핵을 반대하는 세력들이라면 뭐가 잘 못 되도 한참 잘못된 일이 아닌가. 국정 혼란의 책임자들을 향해 당연히 터져 나와야할 질책의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미국의 PBS나 영국의 BBC처럼 공영방송임을 자랑하는 KBS와 MBC가 사사건건 야당을 비판하고 집권세력을 두둔하는 특집과 보도를 내보내고 있는 이 나라는 도대체 어떤 나라인가. 집권 세력의 잘잘못은 따지지 않는 무비판이 판치고 이들 목소리가 마치 진실인 양 확대 생산하는 자랑스런(?) 공영방송이 전파를 쏴대고 있는 한, ‘반노 세력’의 반격은 무위에 그칠 것이 분명하다.
안영모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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