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빈부 격차·고용 불안 심화의 산물
사회복지와 평등주의가 진보정당의 뿌리
‘인간 개조’등 비현실적 목표추구로 몰락
‘진보 정당’이란 ‘진보적 이념’을 실현하는 것을 사명으로 하는 정당이다. 많은 학자들은 근대적 의미에서 ‘진보적 이념’을 처음으로 설파한 책으로 토마스 페인의 ‘인간의 권리’(The Rights of Man)를 든다. 서구 ‘보수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에드먼드 버크의 ‘프랑스 혁명에 대한 고찰’(The Reflections on the Revolution in France)에 대한 반박문인 이 글은 1부와 2부로 돼 있다. 1부에서는 언론, 출판, 집회, 결사 등 소위 국가로부터 개인이 자유를 침해받지 않을 ‘소극적 권리’가, 2부에서는 교육, 의료, 복지 등 소위 국가에 대해 필요 사항을 요구할 수 있는 ‘적극적 권리’ 가 나열돼 있다.
당시 인간이 타고난 천부 불가양의 기본권을 말할 때는 소극적 권리를 의미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인간다운 생활을 하는 데 부족하고 국가가 모든 국민을 먹여주고 재워주며 가르치고 병을 고쳐줘야 한다는 게 페인의 생각이다. 이를 위해 국가는 부자들에 대한 중과세를 통해 복지 비용을 마련하고 모든 형태의 차별을 철폐해 평등한 사회를 이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그의 주장은 그 후 소위 ‘공상적 사회주의’로 불리는 생시몽, 푸리에, 오웬에서 ‘과학적 사회주의’로 불리는 마르크스주의를 거쳐 사회 복지를 내건 모든 ‘진보 정당’의 뿌리를 이루고 있다.
소수 이론가들의 머리 속에서 싹튼 ‘진보주의’ 운동이 대중에 널리 확산된 것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서다. 1900년대를 기점으로 급속한 산업화를 이룩한 미국에서는 빈부 격차의 심화, 열악한 노동 조건, 경기 사이클로 인한 소상인과 봉급 생활자의 불안 등이 겹치면서 기업에 대한 규제와 사회 개혁을 부르짖는 ‘진보주의 운동’이 일기 시작했다.
‘진보주의 운동가’들의 첫 번째 관심은 급증하는 이혼, 음주와 매춘의 만연 등 사회악을 척결하는 일이었다. 이중 가장 미미한 성과를 거둔 것은 이혼에 관한 부분이다. 개혁 세력 내에서도 ‘이혼이 과연 나쁘기만 한 것인가’하는 의문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캐리 네이션 같은 여성은 술주정뱅이 남편과 이혼하고 ‘악의 소굴’인 살롱을 도끼로 때려 부숴 유명해졌다. 1919년 통과된 금주 개헌안(수정 헌법 18조)은 ‘진보주의 운동’이 이룩한 큰 업적의 하나다.
이들 사회 운동가들의 관심은 점차 재벌 개혁 등 경제 문제로 옮겨지게 된다. 재벌의 담합으로 인한 독점, 돈으로 정치인을 매수하는 금권주의, 노조 탄압 등 대기업의 횡포를 그대로 두고는 진정한 사회 개혁은 불가능하다는데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다. 비즈니스에 우호적이던 맥킨리가 재선된지 몇 달만에 암살범의 총탄에 쓰러지고 부통령이던 시어도어 루즈벨트가 백악관을 차지하자 재벌 개혁은 불이 붙는다. 당시 세계 최대의 독점 기업이던 스탠더드 오일은 ‘재벌 개혁’의 기치 아래 해체됐다.
사회주의 소설가 업튼 싱클레어가 시카고 도살장의 비위생적이고 비인간적인 작업 환경을 고발한 ‘정글’(The Jungle)을 펴낸 것도 이 때며 산업화의 부산물인 오염과 공해에 염증을 느낀 이들이 주축이 돼 환경보호 운동을 일으킨 것도 이 때다. 소시지를 즐겨 먹던 루즈벨트는 이 소설을 읽고 당장 식품 의약업계의 정화를 명령, 지금의 ‘식품 의약국’(FDA)이 생겨나게 됐으며 존 뮤어가 세운 ‘시에라 클럽’은 지금 가장 규모가 크고 역사가 오랜 환경 보호 단체로 남아 있다.
1909년 후계자 태프트에게 대통령 직을 물려주고 퇴임한 루즈벨트는 태프트가 자기 말을 듣지 않자 1912년 ‘진보당’을 결성, 대통령 자리에 다시 도전한다. 실패는 했지만 공화당 현직 대통령인 태프트보다 더 많은 표를 얻었다.
공화당 표가 갈리는 바람에 백악관을 차지하게 된 민주당의 윌슨 행정부 하에서도 ‘진보와 개혁의 바람’은 식지 않았다. 1913년 제정된 직접세 부과 헌법 개정안은 부자들에게 누진세를 가해 빈부 격차를 줄이고 복지 예산 자금을 마련하려 했다는 점에서 ‘진보주의’의 가장 큰 승리로 꼽힌다. 연방 중앙 은행이 통화량과 금리를 통해 경제를 통제해야 한다는 취지 하에 연방 준비제도 이사회가 발족된 것도 1913년이다.
‘진보주의 운동’은 이밖에도 1900년부터 1920년까지 20년에 걸쳐 여권 신장과 아동 노동 금지, 최저 임금, 노동 시간 제한 등등 여러 업적을 이뤄냈다. 이들의 기세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는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전통적 인간상을 사회 전체의 이익을 우선하는 ‘진보주의적 인간’으로 바꿔야 한다는 인간 개조론까지 나오게 됐다.
그러나 한 시대를 풍미하던 ‘진보주의’도 1917년 미국의 제1차 대전 참전을 계기로 급속히 수그러들기 시작한다. “세계 민주주의를 안전케 하기 위해”라는 거창한 구호를 내걸고 시작한 제1차 대전의 성과가 기대에 못 미치자 이상주의 전반에 대한 실망이 퍼지기 시작했다.
금욕주의적이고 집단주의적인 ‘진보와 개혁’도 개인의 자유를 바탕으로 세워진 미국의 건국 이념에 배치된다는 비판이 잇달았다. 거기다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유발된 ‘적색 공포’가 ‘진보주의 운동’에 종지부를 찍었다. 금주 개헌법도 1933년 폐기됐다.
그 후 ‘진보당’은 1924년 대통령 후보를 냈으나 참패했으며 1948년에도 헨리 월러스가 대선에 나왔으나 100만 표 남짓 얻은 채 패한 후 간판을 내렸다. 미국 ‘진보주의’ 정신은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뉴딜’과 존슨의 ‘그레이트 소사이어티’ 정책에 계승된 채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나 ‘인간 개조’와 ‘사회 개조’라는 비현실적인 꿈은 포기한 지 오래다.
한국의 ‘진보 정당’인 민주 노동당은 자본주의 체제를 노동자를 착취하는 체제로 보고 생산 수단의 국유화를 주장하는 등 미국의 ‘진보주의’보다는 훨씬 급진적이다. 그러나 탄생 배경이 재벌, 학벌 위주의 경제 체제에서 심화되는 빈부 격차, 금권 정치, 세계화와 IMF 사태 이후 불안해진 고용시장 등 노동자 농민의 불만이 커지고 있는 시점에서 나왔다는 점은 비슷하다.
민주 노동당은 2012년 집권을 꿈꾸고 있다고 한다. 1900년 탄생한 영국의 노동당이 연정 형태로 집권하는 데는 24년, 단독 정권 수립에는 45년이 걸렸다. 그러나 그 후 잇단 경제 정책 실패로 70년대 말 이후 4차례나 보수당에 참패한 후 시장 경제 체제를 수용하는 환골탈태를 단행하고서야 재집권할 수 있었다.
한국의 민노당은 여러 정당 중 유일하게 철학과 일관된 정책을 갖춘 정당이다. 문제는 그 철학과 정책의 상당 부분이 이미 서구에서는 용도 폐기된 낡은 것이라는 데 있다. 그 동안 철학이 없는 보수 일변도의 정치에 신물이 난 한국 유권자들이 ‘진보 정당’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며 이들이 한국 사회에서 할 일도 있다. 민노당이 언제쯤 진정한 21세기 수권 정당으로서의 면모를 갖출 수 있을 지 두고 볼 일이다.
민 경 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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